서울 출신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경성전수학교(법학)와 경성고등공업학교 두 곳의 입학시험에 모두 합격하였을 때 장연채(張然采)의 영향으로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택하게 되었다.
재학 중 오가와(小河弘道)의 도움을 받아 조선총독부에 들어갔다(1925). 박길룡(朴吉龍)과 함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본관(현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본관(철거) 설계에 참여하여 주로 구조설계를 담당하였다.
박길룡·김세연(金世演)·장연채·박동진(朴東鎭)과 함께 그룹을 이루다가 역시 오가와의 추천으로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가 되었다(1927). 그는 일제강점기하의 유일한 한국인 건축과 교수가 되었고, 광복 후에는 서울공대 건축과의 구심체로 남게 되었다.
42년간 서울공대 건축과 재직하며 조선건축기술단(朝鮮建築技術團)의 건축표준용어 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건축용어를 제정하고(1958), 일본식 용어를 우리의 용어로 바꾸는 일을 장기인(張起仁) 등과 함께 하였다. 대한건축학회의 초석을 놓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여, 학회회장(1958)과 명예회장(1968)직을 맡았다.
사후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추서받았다(1985). 그는 숭덕광업(崇德廣業) 정신으로 고고한 건축학자의 길을 걸어온 몇 안 되는 한국근대건축가의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