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군동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독무덤 · 도랑무덤 관련 생활유적.
목차
정의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독무덤 · 도랑무덤 관련 생활유적.
내용

서해안고속도로 영광IC 구간에 해당되어 1998~1999년 목포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유적은 표고m 내외의 저평한 구릉 사면에 위치하며, 조사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14기, 철기시대 주거지 7기, 주구묘 24기, 토광묘 20기, 옹관묘 14기 등이 확인되었다.

군동유적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철기시대까지 크게 3단계로 구분 가능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Ⅰ기는 청동기시대로서 유적 일대가 송국리형주거지와 같은 주거공간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송국리형 주거지는 영암 장천리유적과 비슷하거나 다소 늦은 시기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보고자는 서기전 8세기∼서기전 2세기후반으로 편년하였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원형에서 방형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축조된 철기시대의 주거지들이 모두 장방형의 평면형태를 이룬다는 사실에서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원형계에서 방형계로 이행함을 확인하였다.

Ⅱ기는 철기시대 전기(초기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유적 일대는 청동기시대 송국리형주거지가 조성된 이후로 지속적으로 철기시대에도 주거공간으로 활용됨과 동시에 주구묘, 토광묘 등 분묘가 어우러진 취락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연대는 기원전 2세기말~기원후 1세기경에 해당된다.

군동 주구묘는 마한지역의 특징적 묘제인 주구묘 기원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한 유적이다. 주구묘는 모두 20기가 조사되었는데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A-18호 주구묘이다. 매장주체부에서는 흑색마연호 1점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 토기는 형태상으로는 청동기시대의 적색마연토기호(홍도)와 거의 같으나 재질이 흑색마연으로 된 것이어서 점토대토기로 대표되는 초기철기시대로 편년해 볼 수 있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흑색마연호는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다수 찾아볼 수 있어 기원전 2세기대까지 올려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주구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이른 단계에 해당한다.

Ⅲ기는 철기시대 후기에 해당되는데, 유적 일대가 취락지에서 다시 분묘조성 공간으로 변모한다. 연대는 직구난형(直口卵形)의 옹형토기(甕形土器), 고식 옹관의 형태, 이중구연호(二重口緣壺) 등을 통해서 볼 때 기원후 2∼3세기대로 설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영광군동유적은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계기적으로 이어진 유적으로, 전남 서해안지역의 선사(先史)·원사시대(原史時代)의 생활 유적과 무덤 유적의 점진적인 변천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분묘 조성과정에서 1인 분묘의 등장과 함께 복수의 매장시설이 안치된 장법(葬法)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서기 3~6세기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출현 배경과 백제가 등장하기 이전의 마한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영광 군동유적』(목포대학교박물관·한국도로공사, 2001)
집필자
이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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