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은 조선시대 강화부윤, 우의정, 어영청도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88년(선조 21)에 태어나 1651년(효종 2)에 사망했다.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했고, 병자호란 이후 도원수로서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인조 사후 사림세력의 북벌론을 청에 누설했고, 1651년 아들의 역모사건 때 사형에 처해졌다.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에 대한 매국 행위 등으로 인조대 이후 오랜 세월을 두고 사림의 비난을 받았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김억령(金億齡)이며, 아버지는 현감(縣監) 김탁(金琢)이다.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음보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처음에 최명길(崔鳴吉) · 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金瑬) · 신경진(申景禛)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 · 김류 · 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 · 조정(趙挺) 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고,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반정 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공신녹훈을 전후해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자,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옥에 있던 기자헌(奇自獻) 등 40여 인의 인사들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죽이자고 주장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했고, 순검사(巡檢事) · 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패전에 대해 심한 공격을 하는 일반 사류들에 의해 계속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 · 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같은 해 우의정 및 어영청 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 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 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부분의 공신 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 사류들은 인조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 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해 인조의 의구심을 받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듯하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 시해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혼인시켜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 무리들과 결탁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인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 · 송시열(宋時烈) · 권시(權諰) · 이유태(李惟泰) · 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해 1650년(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가 즉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 · 이시백(李時白) · 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식(金鉽)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 · 김집 · 송시열 · 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김자점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 · 기진흥(奇震興) · 이파(李坡) · 심지연(沈之演) · 황헌(黃瀗) 등도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 행위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해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