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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녕부(承寧府)

    조선시대사제도

     조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고 태상왕(太上王)으로 있을 때 세운 관서.   1400년(정종 2) 6월 왕세제 방원(芳遠)의 간청으로 태상궁(실제는 상왕궁)을 세워 궁호를 덕수궁, 부호를 승녕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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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승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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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고 태상왕(太上王)으로 있을 때 세운 관서.1400년(정종 2) 6월 왕세제 방원(芳遠)의 간청으로 태상궁(실제는 상왕궁)을 세워 궁호를 덕수궁, 부호를 승녕부라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그리고 관제를 정해 반차(班次)를 삼사(三司) 1인, 윤(尹) 2인, 소윤(少尹) 2인, 판관(判官) 2인, 승(承) 2인, 주부(主簿) 2인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판사 우인렬(禹仁烈) 등이 상왕전에 나가 하례(賀禮)를 올리자 상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는 기록이 실록에 보인다.
    이보다 앞서 1398년(태조 7) 8월 26일 방원은 부왕이 심한 이질로 와병중인 기회를 이용해 정변을 일으켜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죽이고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에 태조는 당황해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할 수 없이 세자를 방원으로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방원이 미봉책을 써서 짐짓 적장(嫡長)이 아님을 내세워 사양하므로 둘째 아들 방과(芳果)를 세자로 정하였다. 그리고 방석(芳碩)·방번(芳蕃) 형제는 먼 곳에 가서 편안히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방원은 도중에 이들을 무참히 죽임으로써 태조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태조는 왕위를 둘러싼 무자비한 골육상쟁에 비탄한 나머지 9일만에 세자에게 양위하고 은퇴하고 말았다.
    이전 제도에 의하면 선위한 임금은 물론 책봉을 받은 왕비나 왕자는 반드시 부(府)를 세우고 그에 소속된 관료들을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종은 즉위하면서 부왕을 상왕으로 모셨을 뿐 관부를 설치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상왕의 노여움이 좀처럼 풀리지 않아 막무가내로 관부의 설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때문인 것 같다.
    3년 뒤 관부를 설치하려고 할 때 “지금 복식(服飾)과 선수(膳壽)주 01)가 부족함이 없는데 새삼 관부를 설립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고 반대한 것을 보아도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상왕의 노여움이 조금은 풀려서 관부의 설치가 가능했던 것 같다. 태조가 방원을 얼마나 미워했던가는 방원이 왕이 되어 옛일을 술회하는 가운데 “지난 무인년(1398) 가을 이후 부왕이 항상 불평을 품어 내가 생전에 왕위를 순조롭게 물려줄 수 없었다.”고 한 기록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승녕부는 그 뒤 1408년(태종 8) 5월 태상왕이 돌아가 3년상을 치르고 다음해 6월에 전농시(典農寺)에 합병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식료품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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