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세자익위사, 공조좌랑, 홍천과 제천의 현감 등을 지낸 문신.
이칭
국빈(國賓)
회와(悔窩), 가주(可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3년(숙종 9)
사망 연도
1752년(영조 28)
본관
순흥(順興)
주요 저서
회와집(悔窩集)
주요 관직
세자익위사위수|공조좌랑|제천현감
내용 요약

안중관은 조선 후기 세자익위사, 공조좌랑, 홍천과 제천의 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김창흡에게 수학하며 성리학을 비롯해, 문학·경세학 등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 대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노론계 문인이나 여항 시인, 이름난 화가들과도 교유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세자익위사, 공조좌랑, 홍천과 제천의 현감 등을 지낸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할아버지는 공조좌랑(工曹佐郎) 안광욱(安光郁), 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 안후(安垕)이며, 어머니 최씨는 최항(崔恒)의 후손이다.

주요 활동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외증손인 가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에게 수학하였으며, 김창흡(金昌翕), 이병연(李秉淵), 민익수(閔翼洙) 등의 노론계 문인들과 홍세태(洪世泰), 정내교(鄭來僑) 등의 주1조영석(趙榮祏), 정선(鄭敾) 등의 이름난 화가와 교유하였다.

경세(經世)주2의 학문을 지향하면서도 문학에도 뜻을 두어 일찍이 김창흡으로부터 문장을 인정받았으며, 김석주(金錫胄), 오도일(吳道一) 등의 당대 대가들에게도 시문을 높게 평가받았다.

당쟁이 극심한 시대에 서인(西人)의 핵심과 연결되면서 동시에 동인(東人)에서 유래한 일부의 가계 내력으로 인하여 주3에 지장을 초래하였는지, 2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입격하였지만, 결국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은거를 결심하였다. 이후 주4로 천거받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되었고, 공조좌랑(工曹佐郎)을 거쳐, 홍천(洪川)과 제천(堤川)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성리학에 몰두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고, 유학을 비롯하여 문학 · 경세학(經世學)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장은 주5주6을 모범으로 하면서, 유가의 학술 이념을 충실히 따라 도(道)의 순수성 보존과 도(道)의 천명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실적이고 현실성을 강조한 명실론(名實論)을 주장하고, 과도한 수식이나 난삽하고 허황된 문장의 창작을 반대하였다.

시는 주7의 시법을 따라 호방하면서도 침울한 미학을 지녔으며, 주8주9의 시를 따라 평담한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아울러 유학의 주10이 송나라 말기 이후 조선에 전해졌으며, 중국과 조선 문장가의 차이는 지정학적 차이에 불과하다는 서술을 통해 비교적 주체적인 논리를 전개하였다.

저서로는 6대손 안종학(安鍾學)이 편집한 『회와집(悔窩集)』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회와집(悔窩集)』

논문

이종묵, 「회와(悔窩) 안중관(安重觀)의 삶과 시」(『한국한시작가연구』 16, 한국한시학회, 2012)
김영주, 「안중관(安重觀) 기문(記文)의 의론성(議論性) 연구」(『동방한문학』 43, 동방한문학회, 2010)
김영주, 「회와(悔窩) 안중관(安重觀)의 문학론(文學論) 연구(硏究) -산문이론(散文理論)을 중심으로」(『동방한문학』 40, 동방한문학회, 2009)
강혜규, 「회와(悔窩) 안중관(安重觀)의 시(詩)에 나타난 자아(自我)와 세계(世界)」(『고전문학과교육』 15,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08)
윤지훈, 「회와(悔窩) 안중관의 문학론에 대한 연구」(『한문학보』 15, 우리한문학회, 2006)
주석
주1

조선 후기에, 위항 문학을 이룬 시인. 대표 인물로는 임준원(林俊元), 정내교(鄭來僑), 이언진(李彦眞) 등이 있다.    우리말샘

주2

세상을 다스림.    우리말샘

주3

벼슬아치 노릇을 하는 길.    우리말샘

주4

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    바로가기

주5

중국 당나라의 문인ㆍ정치가(768~824).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변려문을 비판하고 고문(古文)을 주장하였다. 시문집에 ≪창려선생집≫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6

중국 북송의 문인(1036~1101).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구법파(舊法派)의 대표자이며, 서화에도 능하였다.

주7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712~770).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ㆍ공부(工部)ㆍ노두(老杜). 율시에 뛰어났으며, 긴밀하고 엄격한 구성, 사실적 묘사 수법 따위로 인간의 슬픔을 노래하였다. ‘시성’으로 불리며,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꼽힌다. 작품에 <북정(北征)>, <병거행(兵車行)>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8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1125~1210).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 남송 제일의 시인으로, 나라의 상황을 개탄한 시나 전원의 한적한 생활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글씨도 뛰어났다. 시집 ≪검남시고(劍南詩稿)≫와 기행문 〈입촉기(入蜀記)〉, 사서(史書) ≪남당서(南唐書)≫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9

중국의 시인이자 송나라 시대의 정치인이다. 진여의는 북송과 남송의 교체기, 즉 북송이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남송이 그 뒤를 이은 시기를 살았다.

주10

도학(道學)을 전하는 계통.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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