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 출신. 직장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다.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 · 전랑 ·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彦)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 · 김정(金淨)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 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 · 박세희(朴世熹) · 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宋欽)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 · 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 · 『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년(인조 8)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