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쌍릉 합장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합장릉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영조|정순왕후
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내용 요약

원릉(元陵)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쌍릉 합장릉이다. 영조의 수릉(壽陵)은 고양 서오릉 정성왕후 홍릉에 조성되었으나, 영조 승하 후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조성되었다. 원릉은 효종 옛 영릉의 자리에 조성되어 지대석 등 일부 돌거리는 재사용되었다. 원릉은 사적 ‘구리 동구릉’ 내에 있다.

정의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쌍릉 합장릉.
건립경위

원릉은 1659년 조성된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의 옛 영릉(寧陵) 자리이다. 1673년 주1하면서 기존의 주2는 매장하였던 것을 1674년 현종(顯宗, 1641~1674, 재위 1659~1674) 숭릉(崇陵)에 재사용하였으며, 파손되어 재사용되지 않은 일부 돌거리가 원릉 주변에 있다. 주3 등 일부 돌거리는 원릉에 재사용되었다.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는 생전에 원비(元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 홍릉(弘陵)에 합장되고자 홍릉을 허우(虛右, 오른쪽을 비워 둠)의 제도로 조성하였다. 1776년 영조 승하 후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는 다른 좋은 자리를 찾게하여, 현재의 원릉이 있는 옛 영릉 자리로 바뀌었다.

1776년 영조 원릉 조성 때 정순왕후(貞純王后) 경주김씨(慶州金氏, 1745~1805)와의 합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1805년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능호(陵號)를 경릉(景陵)으로 정하였으나 이후 원릉에 합장되는 것이 결정되어 사용하지 않았다. 정순왕후 합장 시 주4과 난간석(欄干石)을 추가로 제작하고, 장명등(長明燈)과 동쪽의 돌거리들을 이동해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형태와 특징

원릉은 봉분에 난간석을 두르고 주변에 주5, 주6, 주7, 혼유석, 장명등, 주8, 주9, 주10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강 아래에는 주11과 비각(碑刻)이 있으며, 수복방(守僕房)은 현대에 재건되었고, 주12은 남아 있지 않다.

금석문

비각에는 3기의 표석이 건립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구조이다. 비각 안의 표석은 앞면에 ‘조선국(朝鮮國) 영종대왕원릉(英宗大王元陵)’(1776년), ‘조선국(朝鮮國) 영조대왕원릉(英祖大王元陵)’(1890년), ‘조선국(朝鮮國) 정순왕후부좌(貞純王后祔左)’(1805년)라고 새겨져 있다.

1776년에 건립된 원릉 표석은 앞뒷면의 글씨를 정조, 1890년 표석은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 썼으며, 정순왕후 표석의 앞면은 이만수(李晩秀, 1752~1820), 뒷면 주13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짓고, 서용보(徐龍輔, 1757~1824)가 썼다.

의의 및 평가

원릉 돌거리는 18세기 후반 사실적이며 섬세한 조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성왕후 홍릉,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 명릉(明陵)의 돌거리 주14과 양식(樣式)을 계승한 작품이다. 그래서 석인상(石人像)의 얼굴은 온화하며, 장명등은 화려하고, 망주석의 세호(細虎)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원릉은 사적 ‘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내에 있다.

참고문헌

원전

『〔영조(英祖)〕원릉산릉도감의궤(元陵山陵都監儀軌)』(1776)
『〔정순왕후(貞純王后)〕원릉산릉도감의궤(元陵山陵都監儀軌)』(1805)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Ⅶ』(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논문

김민규, 「조선시대 능묘비 연구」(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9)
주석
주1

산릉을 옮겨 모심.    우리말샘

주2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3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4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6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7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9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0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1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2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    우리말샘

주13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주14

종교나 신화적 주제를 표현한 미술 작품에 나타난 인물 또는 형상.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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