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용구(用九).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晩悟). 한사범(韓師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한현모(韓顯謨)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한후유(韓後礻+谷)이며, 어머니는 민익수(閔翼洙)의 딸이다.
1772년(영조 48) 성균관 재학시 황감제(黃柑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6년 주서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을 지냈다. 1779년(정조 3) 문신전강(文臣殿講: 3품 이하의 문신들을 대상으로 어전에서 經書를 考講하게 한 시험)에서 다시 장원으로 뽑혔다.
그 뒤 응교(應敎)·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로 있을 때 올린 소에서 왕을 모독하였다 하여 삭주(朔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다시 이조참의에 오른 뒤 형조참판·대사헌·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99년 평안도관찰사 재직시 평양에 대화재(大火災)가 발생하여 민가 175호가 불에 탄 사건을 당하였다.
그 해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예조판서를 거쳐 1805년(순조 5)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김달순(金達淳)이 사사될 때에 이에 관련되어, 관직을 사퇴하였다.
다시 관직에 나와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812년 이후 여러 해를 좌의정 겸 세자사부(左議政兼世子師傅)로 있으면서 사직소를 거듭 올렸으나, 국사(國事)가 어렵고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사퇴가 허락되지 않을 만큼 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1821년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장례를 치른 다음 사퇴하였다. 1836년(헌종 2) 시호 익정(翼貞)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