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공유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전기, 충주목부사, 예부상서, 병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개명
문고수(文顧壽)
항적(亢迪)
시호
경정(敬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088년(선종 5)
사망 연도
1159년(의종 13)
본관
남평(南平)
주요 작품
「묘향산보현사창사비명」
주요 관직
병부상서|판삼사사
내용 요약

문공유는 고려 전기에 충주목부사, 예부상서, 병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문공인의 동생이고, 문극겸의 아버지이다. 그는 이자겸의 집권기에 정치적인 배척을 받았다가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 복직하였다. 문장이 활달하고 예서(隸書)를 잘 썼다. 묘지명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유물인 청자다완(靑瓷茶碗)이 묘에서 출토한 것으로 전한다.

정의
고려 전기, 충주목부사, 예부상서, 병부상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문공유(文公裕)의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개명(改名)은 문고수(文顧壽), 자는 항적(亢迪)이다. 문공유의 아버지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문익(文翼)이며, 형은 문공인(文公仁) · 문공원(文公元) · 조계종대선사(曹溪宗大禪師) 가관(可觀)이다. 그의 아내는 한안인(韓安仁)의 딸 한씨(韓氏)로 슬하에 문극겸(文克謙) · 문극순(文克純) · 문극이(文克易) 세 형제와 딸 셋을 두었다. 정증(鄭拯), 윤자고(尹子固),이세창(李世昌)은 사위이고, 김국진(金國珍) · 민수(閔脩) · 김원석(金元碩) · 김장(金璋) 등은 매제이다.

주요 활동

문공유는 1102년(숙종 7)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 주관하의 주1에 합격하고, 1112년(예종 7) 3월 지공거(知貢擧) 오연총(吳延寵) · 임언(林彦) 주관하의 과거에서 정지원(鄭之元, 鄭之常) · 최유청(崔惟淸) · 권적(權適)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1116년(예종 11)부터 급전녹사(給田錄事), 첨사부주부(詹事府主簿), 주2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인종의 즉위 후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하자, 이자겸과 맞섰던 장인 한안인이 죽게 되었으며, 주8였던 문공유는 형인 문공인, 가관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이 몰락한 뒤, 그는 1127년(인종 5) 합문지후에 복직되고, 1129년(인종 7)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인종 11)에 문공유는 형인 문공인과는 대조적으로 시어사(侍御史)로서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중(李仲)과 함께,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을 성인(聖人)으로 삼고 천거한 주3 김안(金安) · 정지상(鄭知常) · 이중부(李仲孚)주4 유개(庾開) 및 이들을 추종한 대신들을 배척하라고 요청하였다가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에 문공유는 충의(忠義)로서 주5 호부낭중동궁시독사지제고(戶部郎中東宮侍讀事知制誥)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1147년(의종 1)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서 우정언(右正言) 정지원(鄭知源)과 함께 시국에 대하여 간언하였다. 1148년(의종 2)에 문공유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 1149년(의종 3)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 시형부상서(試刑部尙書)를 지냈다. 이해 7월 의종(毅宗)청연각에서 문공유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이후 문공유는 1151년(의종 5) 예부상서(禮部尙書), 1152년(의종 6) 형부상서(刑部尙書) ·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고, 1155년(의종 9)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문공유는 풍채가 당당하고 문장이 활달하였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백학사의 서남쪽 기슭에 묻혔는데, 묘지석과 함께 출토한 것으로 전하는 청자 유물인 전(傳) 문공유 청자다완(靑瓷茶碗)이라는 국보가 있다. 이 다완의 내면은 국화문(菊花文)과 모란당초문(牡丹唐草文)이 가득하게 백토로 역상감이 되었고 외면에는 국화문을 간결하게 배치한 아름다운 청자로서, 초기 상감 주6의 기준이 되는 자료이다.

학문과 저술

그는 글과 글씨에 능하여 이규보(李奎報)가 인정할 정도였으며, 이 때문에 주로 주7을 역임하였다. 작품으로는 「묘향산보현사창사비명(妙香山普賢寺創寺碑銘)」과 음기(陰記)가 있는데, 1141년(인종 19) 7월 의종의 명을 받아 쓴 것이다.

상훈과 추모

문공유의 시호(諡號)는 경정(敬靖)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이난영 편, 『한국금석문추보』(아세아문화사, 1976)
김용선 편저,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출판부, 2001)
박용운, 『고려 사회와 문벌귀족가문』(경인문화사, 2003)
장남원, 『고려 중기 청자 연구』(혜안, 2006)

논문

박용운, 「고려 전기 문반과 무반의 신분 문제」(『한국사연구』 21·22, 한국사연구회, 1979)
이수건, 「고려시대 토성연구」상(『아세아학보』 12, 아세아학술연구회, 1976)

인터넷 자료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s://portal.nrich.go.kr/kor/index.do)
주석
주1

고려 시대에, 국자감에서 진사를 뽑던 시험. 시험 과목은 부(賦)와 시(詩)이며, 최종 고시인 예부시(禮部試)를 보조하는 예비 고시로 조선 시대의 소과(小科)에 해당한다.

주2

고려 시대에, 합문에 속하여 나라의 의식을 맡아보던 벼슬.

주3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내시부에 속하여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남자. 모두 거세된 사람이었다. 우리말샘

주5

많은 사람 가운데 뽑아 씀. 우리말샘

주6

상감 기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넣은 청자. 우리말샘

주7

고려·조선 시대 문필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직.

주8

고려 시대에, 합문에 속하여 나라의 의식을 맡아보던 벼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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