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대천 출생. 본명은 마리(馬利). 1919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6세에 일본에 건너가 수예선생이 될 생각으로 요코하마기예학교(橫濱技藝學校)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많은 영화와 연극을 보고 배우가 될 꿈을 갖게 되었다.
기예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곧 귀국하지 않고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우기도 했다. 귀국한 뒤 강원도의 금화여학교(金華女學校)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으나 배우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곧 서울로 올라와, 1920년 당시 단성사의 인기 변사인 김덕경(金悳經)의 소개로 김도산(金陶山)을 알게 되어 신극좌(新劇座)에 입단한다.
신극좌의 「오! 천명(天命)」에서 처음 무대에 서게 됨으로써 거의 같은 무렵 연기생활을 시작한 이월화(李月華)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여배우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22년에는 극단 토월회(土月會)에 입단하였으며,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 ·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만년에는 배우극장(俳優劇場)에 입단하여 연기생활을 계속하였다.
최초로 영화에 출연한 것은 이규설(李圭卨) 감독의 「농중조(龐中鳥)」(1926)이었으며, 그 뒤 이구영(李龜永) 감독의 「낙화유수」(1927), 이규설 감독의 「순정은 신과 같다」(1928), 김영환(金永煥) 감독의 「세 동무」(1928) 등에 출연하였다.
의학박사 김성진(金晟鎭)과 결혼하며 연기생활이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박기채(朴基彩) 감독의 「춘풍 春風」(1935)에 출연함으로써 다시 꾸준한 연기생활이 시작되었다. 안종화(安鍾和) 감독의 「역습」(1936),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수업료」(1940), 신경균(申敬均) 감독의 「감격시대」(1943) 등이 광복 전의 주요 출연작품이다.
광복 후에는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는 연극 · 영화 등에서 온후하고 다정한 연기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만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였다. 연기 활동 외에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1955),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 초대위원장(1961) 등을 지내며 영화계의 원로로서 많은 공로를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