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송상현(宋象賢)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사헌부지평, 배천군수, 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송상현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전기 사헌부지평, 배천군수, 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부사맹(副司猛) 송승은(宋承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송전(宋琠)이고, 아버지는 현감 송복흥(宋復興)이다.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0세에 경사(經史)에 두루 통했으며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著作)·박사(博士)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들어와 예조·호조·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집의·사간과 사재감(司宰監)·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 때 부사인 송상현이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뒤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주 01)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송상현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뒤에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의 충렬사·개성의 숭절사(崇節祠)·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고부의 정충사(旌忠祠)·청원의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관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김석희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