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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嶺南學派)

유교단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학파(嶺學派)·퇴계학파(退溪學派)·남명학파(南冥學派)·여헌학파(旅軒學派)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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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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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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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학파(嶺學派)·퇴계학파(退溪學派)·남명학파(南冥學派)·여헌학파(旅軒學派)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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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어떤 사상의 발달이 원숙하고 학자들의 사유의 심도가 깊어지면, 사리(事理)에 대한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능력이 자생하고 나아가 견해를 같이하는 학문의 유파가 형성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에 정주학(程朱學)의 학풍이 일면서부터 학맥(學脈)이 서서히 생기게 되었다.
영남 지방은 지리가 아름답고, 인심이 순후하고 전통적으로 학문을 좋아해 예로부터 장상(將相)·공경(公卿)·문장·덕행·절의로 유명한 이들과 선도(仙道)·불도(佛道)·도교(道敎)에 정통한 이들이 많이 나와서 세인들이 영남을 인재의 고장이라 불러 왔다. 그러한 탓인지 영남 지방에는 조선조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학맥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초기의 김종직(金宗直)을 영수로 하는 영학파, 중기의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파, 이황(李滉)을 종주로 하는 퇴계학파, 그리고 장현광(張顯光)을 주축으로 하는 여헌학파라 하겠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영남학파의 학맥은 정몽주(鄭夢周)에서 비롯해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를 거쳐 김종직에로 계승된다. 김종직은 도학과 문학으로 유명해 당대 유학의 조종이 되었다. 그는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저명한 학자로는 현풍의 김굉필(金宏弼)·곽승화(郭承華), 함양의 정여창(鄭汝昌)·유호인(兪好仁)·표연말(表沿沫), 경주의 손중돈(孫仲暾), 선산의 강백진(康伯珍), 성주의 김맹성(金孟性), 안동의 이종준(李宗準), 청도의 김일손(金馹孫), 밀양의 박한주(朴漢柱) 등이다.
이 학파의 특징은 조선 초기의 학문적 경향이 그러하였듯이 여말의 영향을 받아 유학의 요소 중에서 한편으로는 주로 실제적인 정치·경제·법률·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성리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을 혼합한 것이었다.
이 학파에서 정여창과 김굉필은 특히 도학에 정진하여 후세 한국 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정여창은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연구해 그 심오한 뜻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가장 치중하였고, 궁리(窮理)함을 위주로 하였다. 그리하여 『중용』의 주자장구(朱子章句) 중에서 ‘기이성형, 이역부언(氣以成形, 理亦賦焉)’의 설을 따르지 않고 ‘안유후기지이호(安有後氣之理乎)’라 하여 기(氣)에 뒤지는 이(理)가 있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뒤에 퇴계학파에서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하는 단서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김굉필은 존양(存養)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그것에 도달하는 수단으로는 성경(誠敬)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학에서 새로운 학문 경향이었다. 그의 학통은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에게로 계승되었고, 조광조의 학통은 다시 성수침(成守琛)·성혼(成渾) 부자에게 이어졌으며, 김안국의 학통은 김인후(金麟厚)에게 전수되었다.
또 이언적(李彦迪)의 스승이 김종직의 제자 손중돈이었으니 동방의 사현(四賢: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은 이 영학파의 이학자(理學者)와 그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이 영학파는 연산조에 이르러 훈구파와의 반목 갈등으로 위세가 침몰되었는데, 학술·문장·절의로 정계와 재야에서 대활약을 했던 당대의 유일한 학파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영남우도(嶺南右道)를 중심으로 조식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고 추종하는 학파가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를 남명학파라 하였다. 이 학파의 저명한 인물로는 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김효원(金孝元)·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정탁(鄭琢)·하항(河沆)·하진(河溍) 등을 들 수 있다.
이 학파의 특징은 반궁체험(反窮體驗)·지경거의(持敬居義)·충신진덕(忠信進德)·독행수도(篤行修道)라 하겠다. 천길 절벽 같은 기상을 가진 조식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힘을 쏟아 공리공담을 배척하고 실천궁행함으로써 학문과 덕행을 쌓아 갔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의 학덕에 영향을 받아 기절(氣節)과 의리를 숭상하고 추종하였다.
오건은 자질이 순후하고 기상이 홍대하며 의연하고 효행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학식에 있어서는 『대학』과 『중용』에 밝아 이황도 경탄하였다. 최영경의 청백하고 의로운 절개는 세인을 감복시켰다. 그는 의리가 아니면 한 개의 터럭도 취하지 않았다.
김우옹은 당대 제일의 강관(講官)으로 알려졌으며 ‘사무사(思無邪)’·‘무불경(毋不敬)’·‘무자기(毋自欺)’·‘신기독(愼其獨)’의 네 구를 진학의 지표로 삼았다. 정구는 경학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공이 크며, 정탁은 경사(經史)·천문·지리·병가에 정통하였다. 이들 중에서 김우옹·정구·정탁은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했던 학자들이다.
같은 시기에 영남 좌도(嶺南左道)에서는 이황의 덕행을 숭모하고 그의 학문 사상을 추종하는 유파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퇴계학파라 하였다. 특히, 이 학파는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영남학파로서 이황에게 수학해 도학·문장·덕행·사업으로 일세의 공명이 된 자가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저명한 인물을 약술하면 조목(趙穆)·기대승(奇大升)·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남치리(南致利)·이덕홍(李德弘)·황준량(黃俊良)·권호문(權好文)·김륵(金玏)·홍가신(洪可臣)·정사성(鄭士誠)·김사원(金士元)·유중엄(柳仲淹)·조호맹(曺好孟)·박광전(朴光前) 등의 퇴계문도들과 정경세(鄭經世)·허목(許穆)·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김황(金榥) 등의 사숙들을 들 수 있다.
이 학파는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라 칭하고 그의 철학 사상 중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사칠이기분대설(四七理氣分對說), 그리고 물격설(物格說)을 지지·옹호하다가 마침내는 주리설로 발전하였다. 이황의 철학은 원래 주희(朱熹)의 이기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주희에 따르면,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는 것이고(不相離), 또한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不相雜)이다. 그런데 이황은 이와 기를 서로 섞일 수 없는 것, 다시 말하면 이물(二物)이라는 견지에서 이는 이일 뿐 결코 기가 아니며, 기는 기일 뿐 결코 이가 아니라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理自理, 氣自氣).
주희는 이와 기의 작용에 있어서 기에는 응결 조작 능력이 있지만 이에는 정의조작(情意造作)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기에 똑같이 실질적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이를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사물(死物)로 보지 않고, 태극에 동정(動靜)이 있다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황의 이발이동(理發理動)의 관념을 보게 된다.
이황은 또 가치론상으로 이에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기에는 상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간에 가치의 차등을 두었다. 때문에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서 “사단(四端: 惻隱·羞惡·辭讓·是非)은 이가 발하면서 기가 따르는 것이고(理發而氣隨之), 칠정(七情)주 01)은 기가 발하면서 이가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라 단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이(李珥)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사칠이기분대설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의 설에 의하면, 이와 기는 이물(二物)도 아니요 일물(一物)도 아니요, 다만 하나이면서 둘이요(一而二) 둘이면서 하나인 것(二而一)으로서 일체양면적(一體兩面的) 관계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또,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는 까닭은 이이므로, 기발이승(氣發理乘)은 가하나 이발기수(理發氣隨)는 불가하다고 이를 부인하였다.
그리고 사단칠정에 있어서 사단은 칠정을 포함할 수 없지만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부분만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양분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보았다. 이이는 이와 기의 불상잡(不相雜)보다는 그 불상리(不相離)의 관계성을 중요시하였고, 이는 기에 내재한 존재자로서 활동성이 없는 정물(靜物), 현실적이 아닌 추상적·사유적 표상일 뿐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이기심성론에 대해 이황과 이이 사이에 견해의 차이를 보이자 이이를 ‘동방의 대현’이라고 칭송하는 기호학자들은 율곡설을 옹호하면서 영남학자들과 논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퇴계학파의 이현일은 이황의 사단칠정설은 백세를 기다려도 불혹(不惑)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이이의 그것은 의리상으로 불명한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그의 설은 사단이 정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선불선(善不善)의 견지에서 볼 때 사단은 선일변이요 칠정은 선악을 겸비하고 있으므로 분대하여 불가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의 아들인 이재는 이발설(理發說)의 합리성을 역설한 나머지 기의 작용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으로도 일용행사의 체용(體用)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 이상정에 이르러서는 이가 단순히 무위무력(無爲無力)한 정지체(靜止體)가 아니라 이 자체로써 능히 발위운용(發爲運用)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다시 유치명에 이르러서는 이에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생출한다고 주창하는 동시에, 이는 우주의 주체이며 마음의 본체가 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발전한 이의 개념이 이진상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충되어 이기호발설이 드디어 주리설로 변환하게 되었다. 특히, 이진상은 『이학종요(理學綜要)』와 그 밖의 논설에서 이단주기(異端主氣)의 그릇됨을 역설하고 성현주리(聖賢主理)의 참됨을 주창해 배우는 이로 하여금 주리설이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깨우치는 데 전 생애를 바쳤다.
당시 학계에서 이기사칠논변 외에 논제의 대상이 된 것이 『대학』의 격물(格物)·물격(物格)과 주자주(朱子註)의 현토 문제였다. 이는 인식론상의 문제인데,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간의 논쟁점은 물격에 대한 주희의 주석 ‘물리지극처무부도(物理之極處無不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현토에서는 대체로 율곡학파는 ‘물리지극처(物理之極處)’를 주격(主格)으로 보는 데 반해 퇴계학파는 처소격(處所格)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율곡학파는 물리(物理)가 극처(極處)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본 데 대해, 퇴계학파는 물리의 극처가 나의 마음(吾心)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보았다. 이 논변은 정경세와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과 곽종석 사이에서 특히 격론하였다.
영남의 다른 한 학파는 장현광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헌학파다. 장현광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배척하고 기발이본설(氣發理本說)을 내어 이를 만대불역의 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기를 이물이본(二物二本)이 아니라고 보고 다만 서로 체와 용이 될 뿐이라고 했으며, 따라서 사단과 칠정에 있어서 사단도 정인 이상 이발기발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의심이 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 학파에 속하는 저명한 인물로는 김응조(金應祖)·전식(全湜)·유진(柳袗)·조임도(趙任道)·노형필(盧亨弼)·신적도(申適道)·정극후(鄭克後)·선우협(鮮于浹)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장현광은 평소 퇴계학파인 정구·정경세와 교유했을 뿐 아니라 퇴계학을 묵수하였다. 또한, 그의 문도들 중에서도 장현광의 학설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학설을 수용하면서 스승의 설도 존중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거시적 견지에서 보면 여헌학파는 퇴계학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김종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영남학파는 당대의 사림을 대표한 학파로서 학계·정계·문학 분야에서 혁혁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때는 훈구파와의 반목으로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 도학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한 갈래는 조광조를 통해 기호 지방으로 전해졌고, 다른 한 갈래는 이언적을 거쳐 이황·조식으로 전승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황은 영남좌도에서, 그리고 조식은 영남우도에서 영남학파의 영수로 추앙 받아 많은 문도를 거느리면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이황이 조식을 경우(敬友)로 여겼듯이 조식도 이황을 외우(畏友)로 대해 조식의 문도들이 이황의 문하에 출입했고, 이황의 문도들이 조식의 문도와 교유하면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한때 정인홍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부덕의 소치로 묻어 버리고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화합하여 친목을 더해 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식학파는 그 학맥이 쇠잔해지고 퇴계학파는 그 학맥이 날로 성해지면서 우도·좌도의 구별이 흐려지고 영남의 학자들은 퇴계학파로 흡수되어 급기야는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로 바뀌었던 것이다. 영남학파를 계승하면서 성리학상으로 계승·발전시킨 학맥은 김성일(金誠一)의 문맥을 꼽을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학파가 한때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루되어 당색으로 변신하면서 사회에 해악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영남학파의 순정 철학이 한국 근대의 철학 사상사에 이룩해 놓은 업적은 높고 깊다고 하겠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喜怒哀懼愛惡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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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김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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