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영릉 (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17대 국왕인 효종과 인선왕후 덕수장씨의 능.
이칭
이칭
영릉(寧陵)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효종|인선왕후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7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영릉로 269-10 (능서면) 여주 영릉과 영릉
내용 요약

여주영릉(驪州寧陵)은 조선 제17대 국왕인 효종과 인선왕후 덕수장씨의 능이다. 여주영릉은 1659년 구리 동구릉에 조성되었으나 167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 여주영릉은 인종 효릉을 모방해 제작하여 16세기의 돌거리 도상(圖像)에 17세기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1674년 인선왕후의 능을 효종릉 아래에 조성하여 동원상하릉이라는 보기 드문 형식이 만들어졌다. 현재 사적 '여주 영릉과 영릉(驪州 英陵과 寧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조선 제17대 국왕인 효종과 인선왕후 덕수장씨의 능.
건립경위

여주영릉은 1659년 구리 동구릉에 조성되었으나 1673년 천릉하면서, 인근의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 영릉(英陵)에 주1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시 설치하지 않았다.

여주영릉 주2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 효릉(孝陵) 돌거리를 모방해 제작하였는데,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장릉(長陵)이 이 효릉을 참고했으며, 장릉을 옛 영릉이 참고했기 때문이다. 효릉 돌거리 모방을 위해 화원(畵員)을 파견해 정밀하게 조사해 돌거리 제작에 이용하였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능을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의 능 아래에 조성하여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는 보기 드문 형식이 만들어졌다.

형태와 특징

효종릉과 인선왕후릉은 각각 봉분에 난간을 두르고 주3, 주4, 주5, 주6, 장명등(長明燈), 주7, 주8, 주9를 배치하였으며, 위쪽에 조영된 효종릉에만 주10을 둘렀다. 능강 아래에는 주11과 비각(碑刻), 수복방(守僕房), 주12 등이 있다.

여주영릉 입구에는 보물로 지정된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州 孝宗 寧陵齋室)이 있으며, 이 재실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여주 효종대왕릉 회양목(驪州 孝宗大王陵 淮陽木)이 300여 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금석문

비각 안에 건립된 여주영릉 표석은 조선왕릉 중 가장 먼저 세워진 표석으로 1673년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이때 비석 앞면의 전서(篆書)와 뒷면의 주13는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1641~1681)이 썼으나 복창군이 1680년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사되어 다시 건립하였다.

1673년 여주영릉 표석 건립 시 마련한 세종 영릉 표석용 석재를 사용하여 1684년 효종 영릉 표석으로 건립하였으며, 전서와 음기는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폐기된 표석은 1684년 창빈안씨(昌嬪安氏) 신도비(神道碑)로 재사용되었다.

의의 및 평가

여주영릉은 천릉하면서 인근의 세종 영릉을 따라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돌거리의 크기와 문양 등은 인종 효릉을 참고해 조성되었으므로 조선왕릉 체제의 계승과 돌거리 모방 등의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현재 사적 '여주 영릉과 영릉(驪州 英陵과 寧陵)'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효종(孝宗)〕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1673)
『〔인선왕후(仁宣王后)〕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1674)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Ⅴ』(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논문

김민규, 「조선시대 능묘비 연구」(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9)
김민규, 「조선 왕릉 장명등 연구」(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9)
주석
주1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2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3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5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6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9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0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11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2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    우리말샘

주13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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