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형 ()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용호경』, 『눌계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 의병장.
이칭
군면(君勉)
눌계(訥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7년(명종 22)
사망 연도
1652년(효종 3)
본관
단양(丹陽)
출생지
경상남도 안의
정의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용호경』, 『눌계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 의병장.
개설

경상남도 안의(安義) 출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군면(君勉), 호는 눌계재(訥溪齋). 아버지는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우순보(禹舜輔)이며, 어머니는 팔계정씨(八溪鄭氏)로 판관(判官) 정회아(鄭懷雅)의 증손녀이자 정원보(鄭元俌)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4년(선조 17) 현시(縣試)에 부(賦)로써 일등으로 합격하여 경상도관찰사 이산보(李山甫)로부터 『춘추좌전(春秋左傳)』·『대학연의(大學演義)』 등을 상으로 받았다. 이후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 당시의 명사(名士)들과 두텁게 교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이 황석(黃石)의 수장(守將)으로 있으면서 적의 정세를 정탐한다는 구실로 성문(城門)을 열자, 적들이 성을 공략하여 군사들이 크게 패배하고, 우형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후에 우형은 정온·권극신(權克信)·유지갑(劉智甲)·신덕립(申德岦) 등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백사림의 처형을 촉구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간신들에게 저지당하여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1606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당시 권신(權臣)이던 이이첨(李爾瞻)이 협박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끝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우형의 아들 우여무(禹汝楙)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자 벼슬길에 나서면 절대로 임금을 속이지 말고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 것을 엄하게 훈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고을 주민들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우형은 군사들에게 강홍립(姜弘立)이 적에게 항복한 일을 주지시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원수 보복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뭉쳐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출동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던 중에 화의(和議)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해산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군사와 식량을 모집하여 충청감영(忠淸監營)에 대기하고 있던 아들 우여무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임금을 호위하라고 지시하였다.

우형은 젊어서부터 애국충군(愛國忠君)을 신념으로 여겼고, 평생 동안 명사(名士)들과 국정 전반에 걸쳐 심도있게 논의하였다. 초기에는 도가(道家)·병가(兵家)·불가(佛家)의 서적까지 두루 섭렵하며 비교적 폭넓은 학문을 강구하였으나, 후에 와서는 성리학에만 전념하였다. 그 영향으로 웅장한 필치와 광범한 영역을 소재로 한 훌륭한 글을 많이 남겼다. 저서로는 음양설(陰陽說)을 종합한 『용호경(龍虎經)』과 『눌계유고(訥溪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눌계유고(訥溪遺稿)』
『속천문집(涑川文集)』
『난곡유고(蘭谷遺稿)』
집필자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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