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강계 출생. 1930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으며, 졸업당시 13명 중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그의 졸업작품은 「백화점」이었다. 졸업 후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영선계(營繕系)에 근무하며 조선건축회에도 가입하였다.
학교건축을 주로 담당하였으며 특히 1930년대의 서울시내 국민학교, 중(고)등학교가 대부분 그가 참여(설계·시공)하여 이루어졌는데, 마포국민학교가 그의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의 작품은 당시 경성부청 산하의 학교건물을 대부분 설계, 시공하였던 일본인 건축가 오다(大田)의 영향을 받았는데 수평선과 수직선을 많이 쓰는 모더니즘적인 교사가 당시의 흐름이었다.
경성부청을 떠난 후 화신(和信)빌딩에 있던 대동흥업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계획·설계업무에 종사하였다. 1945년 이후 대동토건(大同土建)에 관계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영선과에 재직하며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화여자대학교과학관(지금의 Appenzeller Hall)을 설계하였다. 광복 후 조선건축회로부터 책 및 비품일체를 인계받아 조선건축기술단(지금의 대한건축학회)의 기틀을 세워놓기도 하였다.
이한철(李漢哲)·김동수(金東洙) 등과 친분을 맺고 기술인으로 활약하던 중 1951년 9월, 청년운동을 하였다 하여 서울 삼청공원으로 붙잡혀가 흉탄에 맞아 학살당하였다. 학살당하기 전까지 조선건축기술단 상무이사로 있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서울의 원남동·비원·안국동 부근에 소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