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길두리 안동 고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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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에 있는 삼국시대 철촉 · 방추차 등이 출토된 돌덧널무덤. 석곽묘.
내용 요약

고흥 길두리 안동 고분은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에 있는 삼국시대 철촉·방추차 등이 출토된 돌덧널무덤이다. 안동 고분이 있는 지역은 해창만이 내륙 깊숙이 내만하는 곳으로, 간척되기 전에는 고분 인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고분은 전체 높이가 4m 가량 되며, 금동신발 2점과 철도, 투구, 청동귀걸이, 청동거울 등이 확인되었다. 고분의 축조시기는 5세기 4/4분기, 활동시기는 5세기 중엽경으로 보고 있다. 고분의 주인공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토착세력자설, 왜인설, 백제 왕·후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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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에 있는 삼국시대 철촉 · 방추차 등이 출토된 돌덧널무덤. 석곽묘.
내용

안동고분은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마을 877-2번지에 위치한다. 이 일대는 해창만이 내륙 깊숙이 내만하는 곳으로, 간척되기 전에는 고분 인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안동고분은 해안변 독립구릉의 정상부(해발 26m)에 있으며 축조순서는 4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단계는 구릉 위에 직경 36m, 최대높이 1.6m의 기단부를 분할성토하였다. 2단계는 기단부 중심부는 석곽 축조를 위한 공간을 남기고 주변부를 성토하되, 중심으로부터 6m 부근에서 최대높이 2.9m, 깊이 1.3m 내외의 반구형 요(凹)부가 형성되도록 도너츠 형태로 쌓았다. 3단계는 요(凹)부 바닥에 충전토를 채우고 주변 분구를 최대높이 3.2m까지 성토하는 한편 요(凹)부에 석곽을 축조하면서 요(凹)부 벽면과 석곽 벽석 사이의 공간은 보강석과 점토를 충전하였다. 4단계는 석곽 개석 위에 적석하고 성토하여 평탄한 분정을 조성하여 전체 높이가 4m 가량 되는 고분을 완성하였다.

매장주체부인 석곽의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이며 장축방향은 동-서이다. 규모는 길이 3.2m, 너비 1.3(서)∼1.5m(동), 깊이 1.6m이다. 동단벽이 서단벽보다 넓고 금동신발 2점이 서쪽에 치우쳐 있으며 석곽 중앙부에서 출토된 철도(鐵刀)의 손잡이가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침향(枕向)은 동쪽으로 추정된다. 석곽의 벽석은 너비 10∼20㎝, 두께 15㎝ 내외의 할석을 편평한 면이 석곽 안쪽으로 향하게 해서 11∼13단으로 축조하였다. 석곽 바닥에는 10㎝내외의 할석을 깔았다.

유물은 동단벽과 서단벽쪽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양 장벽 아래에서도 약간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동단벽쪽에는 투구, 견갑(肩胛), 장방판혁철판갑, 철촉, 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서단벽쪽에서는 금동관(1점)과 금동신발(2점), 구슬류(564점)가 출토되었다. 석곽 중앙에서 출토된 금동귀걸이(2점)나 청동거울(1점)은 원래 시신의 머리와 가슴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주류(투구·견갑·판갑)는 목관을 안치한 다음 목관과 동단벽 사이에 부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동쪽 모서리 부근에서 환두도(環頭刀) 3점과 철모(鐵矛) 2점,석곽 중앙 청동거울 옆에서 철도 1점, 남장벽 중앙에서 철도와 철모가 각각 1점이 확인되었다. 철촉(120점 내외)은 석곽의 남동쪽을 제외하고 세벽 가장자리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는데 크게 6개 군집으로 나누어진다.

2006년 전남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발굴 보고자는 고분의 축조시기를 5세기 4/4분기로 보았고, 피장자의 활동시기는 5세기 중엽경으로 추정하였다.

특징

안동고분 주인공의 출자에 대해서는 토착세력자설, 왜인설, 백제 왕·후설 등이 거론된다. 토착세력자설은 남해안 연안 항로의 길목에 해당하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기항지로 발전하였던 세력, 한군현 시기부터 활동해 왔던 포구세력, 한성시대 최단거리의 간선 교통로와 남해안 연안 항로가 만나는 국제교역항의 지역 세력자, 백제 금동관과 금동신발로 미루어 백제의 지배과정에서 의제적 친족으로 편입시켰던 현지 유력자, 나주 신촌리 9호분의 피장자와 함께 백제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선택·후원된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왜인설은 왜계 석곽과 갑주류를 비롯한 무기류 위주의 부장품들로 미루어 그 주인공을 왜인일 것으로 보되 선진문문을 입수하기 위해 파견된 왜인, 백제의 남해안 진출과 관련된 왜계 관료, 혹은 군사집단 등 약간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백제 왕·후설은 현지 세력자이면서 백제가 임명한 왕·후에 해당한다는 견해이다. 크게 보면 토착세력자설에 해당하지만 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 이 견해에서는 고흥 안동고분 뿐만 아니라 백제계 금동관이 출토된 나주 신촌리 9호분과 함평 신덕고분의 피장자도 왕·후제와 관련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왕·후제는 왕·후가 임지를 옮겨 다닌다는 점과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보이는 방소국(旁小國)에 대해 백제 스스로 자신들과 구분되는 부용국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후제와 연결시키기는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참고문헌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임영진 외, 전남대학교박물관·호남문화재연구원·문화재청·고흥군, 2015)
집필자
이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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