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고려 후기 선승인 혜심(慧諶)이다. 속성은 최(崔) 씨,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시호는 진각국사(眞覺國師)이다. 1178년(명종 8)에 전라도 나주 화순현(和順縣) 출신이다. 아버지는 최완(崔琬)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1201년(신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어머니가 죽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의 지눌에게 가서 어머니의 재(齋)를 올린 뒤 출가하였다. 지눌에게 입적한 후 수선사 2세가 되었다. 혜심은 지눌을 계승하였다. 특히 간화선을 강조하였으며, 수선사가 교단 내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무신정권의 최고 집정자인 최우(崔瑀)의 귀의를 받았으며, 고종으로부터 대선사(大禪師)를 제수받기도 하였다.
1234년(고종 21)에 나이 56세, 법랍 32세로 입적하였다. 왕명으로 월남사(月南寺)에 탑과 탑비가 세워졌다.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구자무불성화간병론(拘子無佛性話看病論)』,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등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다.
1609년(광해군 1)에 경상도 문경 청화산 원적사(圓寂寺)에서 간행하였다. 고려 후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지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오대~북송의 선승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지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 저자 미상의 『염불인유경(念佛因由經)』이 합철되어 있다. 표지는 없다.
목판본이며, 책 크기는 22.5×14.6㎝, 10행 20자로 계선은 없다. 광곽은 사주 단변의 반곽이며 크기는 16.9×12.0㎝이다. 판심과 간기가 각각 있어 따로 개판한 것으로 보이며, 구자무불성화간병론의 판심은 ‘揀’이다.
지눌의 『간화결의론』 등과 합철된 원적 사본 외에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와 합철한 1686년(숙종 12) 전남 낙안 금화산 징광사(澄光寺)본, 『원돈성불론』과 합철한 1616년(광해군 8) 황해도 송화 수증사(修曾寺)본, 남송의 임제종 승려 대혜종고의 어록인 『대혜어록(大慧語錄)』과 합철한 평안도 성천부(成川府) 백련산 영천사(靈泉寺)본 등이 있다. 현재 전하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은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으로, 선 수행의 기본이 되는 지눌이나 대혜종고의 선서와 합철되어 간행된 것이 특징이다.
‘구자무불성화(拘子無佛性話)’ 즉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는 화두(話頭)는 간화서의 대표적인 화두로,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한다. 이 책은 무자화두를 들 때 생기기 쉬운 여러 가지 마음의 병을 열거하여, 수행자들이 이것을 극복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혜심은 먼저 이 화두를 들 때 생기는 열 가지 병을 열거하였다.
①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한 무(無)를 유(有)에 대응한 무라고 생각하는 것, ② 유무에 상대되는 무가 아니라면 진무(眞無)의 무라고 생각하는 것, ③ ‘무’라고 한 데에는 특별한 묘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④ 갖가지 생각으로 무의 뜻을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 ⑤ 그것이 눈을 깜박이는 등의 신호나 방편의 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 ⑥ 담겨 있는 참뜻을 깨닫기 위한 의심은 하지 않고 ‘구자무불성’의 자구에 집착하는 것, ⑦ 의심은 하지 않고 마음을 모두 비워서 생각을 하지 않는 것, ⑧ 화두에 어떤 묘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⑨ 옛 스승이 한 말을 인증(引證)하여 그 뜻을 풀이하려 하는 것, ⑩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어느 때인가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는 것 등이다.
혜심은 다시 이 열 가지 병을 요약해서 유심(有心) · 무심(無心) · 언어(言語) · 적묵(寂默)에 빠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깨달음은 유심으로도 구할 수 없고 무심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언어로 지어낼 수도, 적묵으로 통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구자무불성’ 화두에 하나의 의심 덩이를 집결시켜서 오로지 ‘무슨 뜻으로 개에게 불성이 없는가’를 생각하되 마치 맹렬한 불덩이처럼 화두를 들 것을 가르쳤다.
간화선을 집대성한 남송의 임제 선승인 대혜종고는 간화선 수행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무자화두를 참구할 때의 열 가지 병통 즉 십종병(十種病)으로 정리하였다. 이 십종병은 지눌도 간화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주목하였음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나 『간화결의론』에서 확인된다. 또한 혜심은 지눌에게 출가한 뒤 무자화두(無字話頭)와 십종병에 대한 문답을 통해 최종 인가를 받았고, 지눌의 간화선이 정리된 『간화결의론』은 지눌 입적 후 혜심이 원고를 발견하여 간행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구자무불성화간병론』은 종고-지눌-혜심으로 이어지는 간화선 전통을 확립하고, 간화선을 체계화하였으며, 수선사에서의 간화선 전통을 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