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건(金中建, 1889~1933)은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불폐(不吠) · 연산(蓮山), 도호(道號)는 마루진 · 원백(元伯)이다. 달리 부르는 이름은 김소래(金笑來)이다.
1905년 서당을 운영하였다. 1908년 서당을 개조하여 연명학교를 열어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1909년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1911년 천도교 영흥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천도교 개혁의 필요성을 설파(說破)하다가 이듬해 교구장에서 해임되었고 출교를 당하였다.
천도교신인회를 조직하고 함경도 일대의 천도교인을 포섭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13년에 건원(建元) 선포 후 원종교(元宗敎)을 창립하고, 함경도, 평안도,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을 돌며 포교하였다.
1914년 봄 북간도 옌지현〔延吉縣〕 국자가로 망명하여 건원학교를 세웠다. 다시 훈춘〔琿春〕과 서간도 안투현〔安圖縣〕 도전동에 자리를 잡은 후 도전학교를 세웠다. 1916년 안투현 북구로 이주해서 북구학원을 세웠다. 이곳에서 원종교를 전파하고 원종교 본부인 법회총사(法會總司)를 열었다. 하지만 안투현 당국에 의해 기밀 서류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다시 장백산 덕수에 자리를 잡고 원종촌을 건설하고 덕수학원과 건원학교를 세웠다.
1920년 안투현 흥도자에서 200여 명의 청년으로 대진단(大震團)을 조직하고 러시아 보병총으로 훈련시켰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으로 일어난 경신참변 때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였다.
1921년 대진단이 통합 운동에 앞장서서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한 무장단연합회를 구성하였으나, 장백현(長白縣) 덕수에서 회의를 개최한 지 6개월여 만에 대진단은 흥업단에 병합되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대한국민단이 결성되었다.
1921년 가을 북간도 화룡현 삼도구 원화동으로 이주하여 원종교 교단을 정비하고 학교를 세웠다. 또한 대한국민단 지단장으로서 안투현에 원종교인을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해 12월 안투현에 파견된 청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검거되었다. 1922년 초 일본 용정총영사관에서 3년간 중국 재류금지 명령을 받고 강제 귀국하였다.
1925년 봄 원종교 총사가 있는 허룽현〔和龍縣〕 개척리로 돌아와 만종학원과 건원중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듬해에는 두 학교를 합쳐 농대학원을 설립하였다. 공산주의 청년운동단체인 동만청년동맹의 활동으로 원종교 청년 상당수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양자 간의 갈등이 커지는 가운데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국내로 끌려와 1927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28년 이후에는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영안현(寧安縣) 와룡향 영산촌 팔도하자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황무지를 개척해 마을을 건설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을 위한 진우회를 창설하였다.
또한 길림구국군의 왕덕림 부대와 함께 1933년 1월 동녕현(東寧縣)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그해 3월 한국독립군의 이청천으로부터 연합 제의가 들어와 수용하였다. 얼마 후 길림구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