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7월 봉천성 무송현에서 항일운동을 위해 윤세복이 김호(金虎), 김혁(金赫) 등 대종교 인사들과 협의해서 조직하였다. 오제동(吳濟東), 이원일(李源一), 이현익(李顯翼) 등 대종교 중견 간부들이 함께 운영에 참여한 이주 한인 사회의 결사 단체였다.
흥업단은 표면적으로는 이주 한인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산업진흥을 표방하였다. 그러면서 실제적으로는 이주 한인을 결속시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항일 무장투쟁의 배후지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이 단체가 위치한 무송현 지역은 산악이 중첩되고 있는 천연의 요새지였기에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용이하였다.
독립전쟁에 필요한 청년을 양성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된 북간도(北間島)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중국 관헌들과 중국인에게 한중 연합으로 일제에 항전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주 한인 사회를 위해 송림병원(松林病院)을 개설하였는데, 병원의 책임자 윤필한(尹弼漢)은 윤세복의 큰아들이었다.
많은 무장운동단체가 장백(長白) 지역에 모이자, 이들을 통합한 단체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윤세복은 1921년 1월 흥업단을 포함한 광복단(光復團), 대진단(大震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태극단(太極團) 등을 소집하였다.
청산리 대첩 이후 홍범도(洪範圖) 부대, 김좌진(金佐鎭) 부대 등이 모두 북만(北滿)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윤세복과 대종교 세력이 남게 되었다.
1921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에 따라 이곳에 남은 무장세력인 광복단, 대한독립군비단, 대진단, 태극단, 흥업단은 통합하여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