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운동 이후 중국 장백현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계 아래 1919년 11월 1일[음력 9월 9일] 대한독립군비단[약칭 군비단]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조직 당시 단장은 이희삼(李熙三)이고, 부단장은 이태걸(李泰杰)이었다.
설립 당시 약 300명 정도의 인원을 보유하였으며 중앙에 총무부 · 이사부 · 군사부 · 경호부 · 문화부 · 서무부 · 교통부 · 외무부를, 함경도 각 지방과 간도 일대에는 지단(支團)을 두었다. 주요 임원은 이동백(李東百), 윤덕보(尹德甫), 김찬(金燦), 정삼성(鄭三星) 등이었다. 입단금, 의무금, 의연금(義捐金), 모연금(募捐金) 등의 재정으로 운영되었다.
군비단은 무장 활동과 함께 설립 초기부터 군자금 및 대원 모집 활동을 병행하였고, 통신국을 설치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이어나갔다. 또한, 국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만주 지역 통신국 역할을 하고, 함경도에 형성된 인적망을 조직 활동에 활용하였다.
1920년 8월에는 김택률(金澤律)이 함경도에 파견되어 김정익(金鼎益)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었다. 12월에는 주덕기(朱悳基)와 방을남(方乙南) 등이 간도 및 국내와 연계를 통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총단(總團) 부근에 하사를 양성하는 중학강습소, 지방에는 예비군을 양성하는 소학교를 설립해 자체 군사학교를 통해 예비 단원을 육성하였다. 이러한 교육기관은 독립군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만주에서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군비단은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의 부대 통합 계획을 듣고, 1920년 11월 15일 제2차 대회를 개최해 연해주 지역으로 군사본부를 이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1921년 3월 1일 윤동선(尹東鮮)을 소대장으로 하는 부대가 1차로 연해주로 출발한 후, 9차에 걸쳐 군비단 군사부 대원들은 연해주 이만으로 떠났다. 당시는 연해주와 간도에서 모여든 한인 무장 부대들이 이만을 거쳐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지금의 러시아 스보보드니]로 옮겨갔던 시기였다.
군비단 군사부 역시 연해주 이만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자유시로 옮겨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수정되어 군비단은 이만에 남아 소비에트 적군(赤軍)과 연결하여 백군(白軍) 및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군비단 군사부는 부대를 이만 부근 한인마을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1921년 7월 13일 3차 회의를 열어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개편되어 그해 12월 이후 이만 전투와 연해주 해방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간도에 남은 군비단 본부는 1921년 6월 1일 장백현 16도구(道溝) 신창동(新昌洞)에서 광복단(光復團), 흥업단(興業團)의 대표들과 연합회를 개최하고 광정단으로 통합하였다. 1923년 초 본부를 장백현에서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전하여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