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비는 논이나 밭을 가는 원시적인 형태의 농기구이다. 지역에 따라서 따부·따보·탑 등으로 불린다. 농경문화 발생 이전 수렵채집민이 사용하던 굴봉에서 발전된 것이다. 따비가 발전하여 쟁기나 극젱이가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말굽쇠형따비, 코끼리이빨모양따비, 주걱형따비, 송곳형따비가 사용됐다. 농업이 시작된 당시부터 전국적으로 사용되다가 농경술과 농기구의 발전에 따라 20세기에 들어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근래에까지 서해안과 도서 지역, 제주도에서는 극젱이로 갈고 남은 구석진 땅이나 돌밭을 가는 데 사용되었다.
농경문화 발생 이전의 수렵채집민이 사용하던 굴봉(掘棒)에서 발전된 것으로 따비가 발전하여 쟁기나 극젱이가 나타났다. 근래에까지 서해안과 그 도서지방 및 제주도에서 극젱이로 갈고 남은 구석진 땅이나 돌밭을 가는 데 사용되었다.
요즈음에는 솔뿌리나 청미래덩굴 등을 캐기도 하는데 이를 ‘솔따비’라고 하며, 따비로나 갈 수 있을 만한 좁은 땅을 ‘따비밭’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서 따부(경기도 덕적도 등지) · 따보(전라남도 영광군) · 탑(함경북도) 등으로 불리며, 『농사직설』에는 ‘耒’, 『산림경제』에는 ‘地保’, 『해동농서』에는 ‘‘長鑱(ᄯᅡ뷔)’로 표기되어 있다.
3, 4세기의 청동기에 따비를 쓰는 모습이 나타나고 철기시대 유적지에는 따비의 날이 명도전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낙랑군의 고분에서 출토된 전(塼)에도 이의 그림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따비 사용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려 준다.
따라서 따비는 이 땅에 농업이 시작된 당시부터 거의 전국적으로 사용되다가 농경술과 농기구의 발전에 따라 내륙지방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 자취를 감추게 되나, 일부 해안이나 도서지역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쓰였던 따비는 다섯 종류로, 그 분포지역은 확연히 구분되며 서로 공존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첫째, 말굽쇠형따비(무게:몸체 6.9㎏, 날 800g)는 경기도의 덕적도 · 풍도 · 자월도 등지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아래쪽이 앞으로 조금 휘어 나간 몸체 위쪽에 손잡이를 가로대고 몸체 중간의 턱이 진 곳에 발판을 달았다. 그리고 극젱이의 보습처럼 얇게 깎은 몸체 끝에 말굽쇠모양의 쇠날을 끼웠다. 이는 가로 끼운 손잡이를 옆으로 돌려서 흙을 떠엎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둘째, 코끼리이빨모양따비(무게:9㎏)는 전북특별자치도와 전라남도 해안 및 도서지역과 제주도에서 사용되었다. 1970년 대전에서 발굴되어 관심을 모았던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 이것을 사용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발판까지의 몸체는 말굽쇠형따비와 비슷하나 손잡이가 없고, 위 끝이 앞으로 길게 휘어서 뻗어 나갔다. 발판 아래쪽에는 코끼리 이빨처럼 끝이 뾰족한 세모꼴의 쇠날 두 개를 박았기 때문에 쌍따비라고도 한다. 휘어진 자루가 길어서 날을 땅에 박고 그 끝을 아래로 잡아 내리면 흙이 떠올려진다. 자갈밭에서 쓰기에 알맞다.
셋째, 주걱형따비(무게:6.8㎏)는 제주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형태는 말굽쇠형따비와 비슷하나 단지 날의 모양이 다르다. 몸체 끝에 끼운 쇠날은 통으로 부어서 만든 것으로 윗부분은 괭이의 괴통처럼 둥글고 날의 너비는 좁은 편이며, 날 끝이 다른 따비처럼 뾰족하지 않고 주걱처럼 둥그스레한 것이 특징이다. 몸체 중간에는 말굽쇠형따비와 같은 모양의 발판을 달았다. 이는 발판에 발을 올려 놓고 날을 땅에 박은 다음 손잡이를 옆으로 돌려서 흙을 떠올리게 되어 있다.
넷째, 송곳형따비는 제주도에서 주로 쓰였다. 대체로 따비의 전신이라고 할 굴봉을 닮았으며, 따비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날 끝이 송곳처럼 뾰족하다. 몸체는 곧으며 중앙부의 오른쪽에 발을 올려 놓을 만한 옆가지가 달려 있다. 제주도에서 밭에 박힌 돌 등을 들어내는 데 적합하다.
다섯째, 일종의 변형으로 몸체는 코끼리이빨형을, 날은 말굽쇠형따비를 닮았다. 충청남도 가의도 등지에서 쓰였으나, 널리 분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