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1597년 8월부터 1599년 7월까지 2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던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찰방 함일(咸一)의 아들로,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자질로 특히 경서에 몰두하였다.
정유재란 때 부친을 따라 난을 피해 서해안 칠산(七山) 바다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때 갑자기 왜의 수군을 만나자 어머니 이씨, 부인 박씨, 제수 이씨, 아직 출가하지 않은 여동생 등 4부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만약의 재앙에 대처하였다.
다만, 늙은 부친과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저자와 동생 희득(希得) 등은 일본에 압송되어 아파주(阿波州)의 왜군 진영에 이르렀다.
이 두 형제는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망궐(望闕) · 망향(望鄕) · 망해(望海)라는 세 단(壇)을 만들어놓고 초하루와 보름이면 나라와 부모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한편, 현소(玄蘇) 등 학문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경전의 뜻을 설명하기도 하고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런 저자의 문장과 절의에 감복한 왜인들은 이들을 ‘족하(足下)’니, ‘가객(佳客)’이니 하여 존경을 표시하였을 뿐 아니라 1598년 11월에는 배를 주어 귀국하게 해주었다.
귀국 후 부친의 뜻에 따라 향시(鄕試)에 세 번이나 장원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무오정란이 있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임천에서 책을 벗하고 일생을 마쳤다.
일기체로 이루어진 이 책은 권두에 피란 생활을 할 때와 포로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귀국할 때 함께 했던 사람의 명단이 있고 자서(自敍)와 최익현(崔益鉉)의 서문이 있다. 일기의 내용에는 풍토기 이외에도 당시 많은 포로들의 생활상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일본풍토기’라는 제목 하에 일본의 지리 및 풍속, 임진 · 정유 왜란에 참여한 왜군의 숫자와 장수 명단이 적혀 있다. 또한 4부녀가 바다에 투신한 일에 대해 1681년에 정려문(旌閭門)을 짓게 하고 ≪삼강록 三綱錄≫에 싣도록 한 예조(禮曹)의 완문(完文)이 실려 있다.
1902년에 초간, 1965년에 중간했으며, 1986년에 국역, 간행하였다. 당시 기록으로는 아우 희득의 ≪월봉해상록 月峰海上錄≫이 있는데 이 책에 비해 내용이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