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매일의 일과 경험을 개인적인 느낌이나 사고의 추이에 따라 기록하는 자유로운 산문 양식이다. 작자의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진술이 위주가 되므로 자전적인 기록의 성격을 띤다. 보통 먼저 날짜 및 기상의 상태를 기록하고 사건과 자신의 생각을 쓴다. 문체나 표현상의 제약 및 격식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일기는 잡록과 야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보충적 사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또 규범적인 문장에 담을 수 없는 풍속과 사회 현상들을 포용할 수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가치가 높은 일기들이 많다.
작자의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진술이 위주가 되므로, 대개는 자전적인 기록의 성격을 띠게 되고, 그만큼 진솔한 내면의 표현이 이루어지는 문체적 특성을 가진다. 날짜 및 기상의 상태를 기록하고, 시간 순차에 따라 그날 그날에 일어났던 사건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체제를 취한다. 그 밖에 문체나 표현상의 어떠한 제약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남에게 보이거나 출판하려는 의도없이 쓰는 것이기에, 일정한 문학적 틀을 가지고 창작되는 시나 소설 등 다른 종류의 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표현상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기록자의 내면의식이 형식에 의하여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총체적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다. 따라서, 일기를 ‘ 산문 중에서 가장 자유스러운 체제’,‘문학의 핵심’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통문학양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자유로운 형식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일기는 의도적 변개(變改)가 가해지지 않는 기록으로서 사회사적 · 정치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연 · 월 · 일의 날짜와 날씨가 먼저 기록되는 것이 보편적인 형식이다. 여행일기 등은 특히 이러한 틀을 잘 따르고 있다. 그런데 날씨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연 · 월까지만 기록한 안방준(安邦俊)의 『묵재일기(默齋日記)』와 같은 예도 있다. 『묵재일기』는 저자 안방준이 이른바 인조반정의 주도적 인물인 이귀(李貴)에 대한 사실을 보고 들은 대로 적은 것으로, 저자 자신에 대한 기록이라는 일기의 일반적인 틀조차 벗어나 있다. 이는 그만큼 일기의 형식이 자유로운 것임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날짜와 날씨 등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 대개 서술의 중심이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사건에 있지 않고, 사회적 · 정치적 일인 경우가 많다. 사건의 흐름이 중심이기 때문에 날짜 등은 중시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묵재일기』는 3권으로 되어 있는데, ‘평거언행(平居言行)’ · ‘반정시사(反正時事)’ · ‘치역논변(治逆論辨)’ 등의 소제목 아래에 월 혹은 계절을 단락으로 하여 다시 분류하고 있다.
일기에서는 보편적으로 사건의 순차성과 시간성이 중시되는 편년체기사(編年體記事) 기록방식이 중시되는데, 이 방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 있고, 그 격식에서 벗어나는 양식도 있다. 보편적인 격식에서 벗어나는 경우라 하더라도 기본 바탕에서는 시간적 순차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일부 기사본말식(記事本末式) 기록양식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정치적 사건 혹은 특별한 주제에 관하여 기록자가 집중적이고 의도적인 관심을 드러낼 때 이런 형식이 나온다. 단일한 주제에 대한 일지형태가 되는 것이다.
편년체기사 기록방식은 여행일기나 진중일기(陣中日記)가 많이 취하는 형식이다. 최초의 이역 기행문이라고 할 수 있는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또, 바다에서 뜻밖의 풍랑을 만나 정처없이 표류하면서 겪은 체험과 이국풍속 · 제도의 견문을 일기체로 엮은 ‘표해록(漂海錄)’ 계통도 시간적 순차성을 중시하고 날짜와 기상상태를 정확히 기록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최부(崔溥)의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제주도에서 출발한 저자가 풍랑으로 중국에 들어가 겪은 일, 보고 들은 풍물 등이 날짜별로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중국 북경까지의 여행일기인 ‘연행록(燕行錄)’ · ‘조천록(朝天錄)’ 종류도 이러한 일기의 체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주로 서장관이나 수행원에 의하여 기록되는 연행록은 이국풍물과 제도를 주로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대표적인 것으로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등이 있다.
그런데 대개의 연행기는 날짜별 기록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특이한 사건이나 풍물에 대하여는 별도의 제목으로 독립시켜 다루고 있다. 기(記)의 형식으로 독립시키는 경우도 있고 주제별로 다룬 사례도 있는데, 중국인과의 문답을 따로 기록한 「열하일기」의 ‘황교문답(黃敎問答)’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날짜별 기록 부분은 묘사나 설명이 강한 반면, 특정한 주제로 독립된 부분은 논의적 문체로 사상적 측면이 강하다.
표해록이나 연행록은 녹(錄)이라는 제목 아래 일기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전쟁상황을 기록한 진중일기는 ‘날마다의 상황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가진 일기’라는 표제가 말해주듯 일기의 형식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수행기록인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녹 종류의 일기는 외면적인 사건전개를 묘사하는 데에 충실하다. 작자의 내면적 반응을 기록한다 하더라도 주로 관리나 학자로서의 가치관을 표는 것이 주가 된다. 반면, 「난중일기」는 이순신 개인의 효성과 우애 등 일상적인 일을 기록하여 인간성이 진솔하게 표현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중일기는 임진왜란 때 것이 가장 많은데, 이정암(李廷馣)의 「서정일록(西征日錄)」, 사명당(四溟當)의 「진중일기」(원제는 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역 정벌일기로 알려진 「북정일기(北征日記)」 같은 것도 진중일기로 볼 수 있다.
사건의 시말을 중심으로 하는 일기는 여행일기나 진중일기처럼 날짜 · 날씨 기록을 필수적인 형식으로 수용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간단히 연(年)만 기록한 것도 있고, 그것조차 생략한 것도 있다.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것으로, 1602년(선조 35) 인목왕후의 책립으로부터 인목대비가 유페되기까지의 사실을 기록한 「청백일기(淸白日記)」와, 이귀가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인조반정의 시말을 기록한 「연평일기(延平日記)」가 대표적인 예이다. 「계축일기」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예를 보면, 사건 중심 일기에서 연 · 월 · 일의 시간기록은 그 자체로 중시되었던 것이 아니고, 사건의 사실성을 보충해주는 정도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록이 개인의 역사가 아니고 정치적 · 사회적 사건일 때 이러한 양상을 뛴다. 시간적 역사성 자체가 중시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의 의미가 중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록의 범주에 포함되는 『광해군일기』 · 『연산군일기』 등은 개인의 자전적 역사기록은 아니지만, 역사성 자체가 중시되는 기록이기 때문에 당연히 연 · 월 · 일 · 시의 기재가 중시된다.
동양문화권에서 일기는 비교적 늦게 발생한 문학양식이다. 물론 『사기(史記)』나 『자치통감(資治通鑑)』, 우리 나라의 『삼국사기』 등 편년체 역사기술방식은 넓은 의미에서 일기라고 할 수 있으나 독립된 문학장르로 인식되고, 일기라는 명칭이 보이는 것은 명대(明代) 후기 때로 간주된다. 일기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일기의 실체를 갖춘 작품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구양수(歐陽脩)의 「우역지(于役志)」, 육유(陸遊)의 「입촉기(入蜀記)」, 범성대(范成大)의 「오선록(吳船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일반적인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와 같은 종류로 취급되어 일기라는 고유의 명칭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명(明)나라 말기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서하객(徐霞客)의 「유기(遊記)」는 일기체로 씌었지만 그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작자들은 일기를 독립적인 장르로 인식한 것이 아니고, 기 혹은 녹의 일종으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말(明末) 이후에 와서 일기라는 제목을 갖춘 작품이 이른바 소품 작가(小品作家)의 손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기가 참다운 성정(性情)을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였다. 마음을 따라 기록하여 수식을 하지 않으니, 작가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는 논리였다.
일기가 독립된 장르로 인식되지 못한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의 중국 작품들은 제목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여행기록이 대부분인데, 고려시대의 여행기록도 기 · 녹 혹은 유기(遊記)라는 제목을 가진다. 이규보(李奎報)가 전주지방을 두루 다니고서 기록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는 제목이 시사하듯 월 · 일의 시간적 순차성이 의식된 최초의 일기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작자 스스로는 ‘기’의 변종으로 인식하여 제목을 붙였다.
천인(天因)의 「천관산기(天冠山記)」,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 등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두류기행록(頭流記行錄)」, 채수(蔡壽)의 「유송도록(遊松都錄)」, 이륙(李陸)의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 남효온(南孝溫)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보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記)’란 사물과 사건에 대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이 차차 사물의 유래와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여기에 작자의 소견이 첨가되면서 나중에 논(論)이나 설(說)의 성격에 접근한다. 건물이나 정자를 수축한 기록이 기의 형식을 유지하되 때로는 그 이름을 풀이하면서 서술자 자신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드러내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다. 고려나 조선 초기의 여행기들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에 의지하여 서정적 차원을 넘어서는 작자의 심회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기로 명명된 여행일기 뿐 아니라 녹으로 씌어진 여행일기도 마찬가지이다. 일기가 기나 녹 종류의 문학장르로 인식되었다는 증거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도 일기는 기 · 녹과 같은 범주로 취급되었다. 같은 중국여행기임에도 김창업은 「노가재연행록」,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연기(湛軒燕記)」, 박지원은 「열하일기」라 이름하였다. 기와 녹이라는 용어는 여행기에서만 혼용된 것이 아니다. 조정의 역사기록을 임금의 이름을 붙여 ‘○○실록’이라고 하는데, 『노산군일기』 · 『연산군일기』 · 『광해군일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는 폐왕(廢王)임을 구별하려 하였던 것인데, 일기라는 말로써 폄하의 뜻을 나타내자는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본적으로 녹과 같이 쓰일 수 있는 의미를 함축하였기 때문에 대치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인 기록물에서도 이와 같이 혼용이 있었다. 광해군 즉위, 인목대비 폐위, 인조반정 등 선조 · 인조 연간의 일련의 사건을 똑같이 다루면서도 「청백일기」 · 「연평일기」 · 『묵재일기』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작자미상)처럼 일기로 표기한 것이 있다. 반면,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작자 미상) ·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작자 미상) · 「정무록(丁戊錄)」(黃有詹) 등 녹으로 적은 것도 있다. 혹은 「계갑일록(癸甲日錄)」(禹成傳) · 「응천일록(凝川日錄)」(작자 미상) 등 일록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록자의 명칭 뒤에는 ‘일기’가 붙고, 간지(干支) 다음에는 ‘녹’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역으로 유추하면, 일기형식의 글에는 반드시 ‘일기’라는 말이나, 간지를 표기하여 시간을 드러내고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기 · 일기 · 녹 · 일록 등으로 이름이 다른 것은 이 명칭들이 각기 독립적인 장르로 인식되지 않고 공통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기는 사물의 유래, 사건의 시말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녹과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일기는 매일매일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기와 차이가 있을 뿐 사건 · 사물을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한편 기와 일기는, 기록자의 주관적 견해가 표출되고, 소재가 자유분방하게 수용되어 모두 전통적인 한문학의 기 형식에서 상당히 벗어나게 된다. 기와 일기는 이러한 공통점을 가지면서 상황에 따라 편년체 기록방식을 취하기도 하고, 기사본말식 기록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주관적인 감정표현의 깊이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일기와 녹의 형식적 · 내용적 성격이 같게 된 이유는, 문인들이 모두 이것들을 잡록류(雜錄類) 내지는 잡기류(雜記類)로 간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경우 초기 일기체 형식이 필기잡록 혹은 수필잡록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때로는 야사적인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전통적인 문장에 대응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소설 혹은 소품의 범주에 넣기도 하였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에서도 다르지 않다. 고려시대의 짤막한 여행기 형식의 기와 녹은 전통적인 문장형식에서 벗어난 면모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동문선』에 실려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장편화한 일기는 전통적인 격식을 벗어난 문장으로 여겨졌다. 위에서 예로 든 조선시대의 일기록 · 일록 등이 『용재총화(慵齋叢話)』(成俔) · 『필원잡기(筆苑雜記)』(徐居正) · 『패관잡기(稗官雜記)』(魚叔權) · 『청파극담(靑坡劇談)』(李陸) · 『견한잡록(遣閑雜錄)』(沈守慶) 등과 함께 『대동야승』 · 『광사(廣史)』 · 『패림(稗林)』 등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때 편찬자가 이들을 같은 차원의 잡록 혹은 잡기문체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기는 정통적인 문학작품이 아니고 잡록과 야사(野史)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폄하될 소지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규범적이고 정신적인 문장으로 담을 수 없는 자유로운 사고를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필원잡기』에서는 『사가집(四佳集)』이나 『동문선』의 체계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서거정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사료로서의 역사적 가치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단계일기(端磎日記)」(金麟燮)의 경우, 진주민란(1862)을 비롯하여 이 민란의 도화선이 된 산청 · 단성의 농민봉기의 과정과 배경을 저자의 시각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이는 단성 지역의 봉기를 진주민란에 뒤이은 결과적 사건으로 보던 종래의 견해를 수정해주고 있다. 규범적인 문장으로 담을 수 없는 풍속과 사회현상 제반에 관한 사실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문화사적 · 사회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일기도 있다. 일기의 이러한 잡기적 · 잡록적 성격 때문에 오늘날에도 일기를 수필문학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삼국사기』와 같은 편년체 역사기록을 일기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우리나라의 일기체 문학은 여행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용재총화』나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등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 어떤 면에서는 일기가 가지는 잡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주제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등 일기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기의 변체격인 이규보의 「남행월일기」, 이곡의 「동유기」 등을 여행일기의 시발로 보아야 한다.
아직 잡록 혹은 잡기류가 일기체로서 인식되지 않고 정통문학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작품은, 개인적인 취향에 의하여 기록되기는 하였지만, 자유로운 정신세계의 표현으로서의 일기적인 성격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조 전기의 문집에 실려 있는 간단한 여행기록에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표해록류의 여행일기도 마찬가지이다. 최부의 「금남표해록」은 표류라는 한계적 상황에서의 내적 갈등 등 인간적인 면모는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려나 조선 전기시대가 개성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성은 아니다. 장한철(張漢喆)의 「표해록」은 1770년의 일기인데도 마찬가지 모습이다. 표해록은 표류라는 절박한 상황의 기록이므로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내면 갈등의 기록이 될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객관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읽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작가의 기술태도 때문이다. 한 단계 여과된 감정이나 논리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국적인 소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여행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국풍물 위주로 기록된 것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연행록 · 조천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항해노정일기(航海路程日記)」(1624년, 尹暄의 사행록) · 「부경일기(赴京日記)」(1533, 蘇世讓의 사행록)를 비롯한 조선 후기의 중국 여행기는 대개 일정과 그에 따른 견문을 기록하였다. 이 연행일기들이 사실묘사 위주로 된 것은 조정에 보고할 등록(謄錄)을 작성하기 위한 예비기록의 성격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국내여행 기록도 사실묘사에 치중한 것을 보면, 이런 글들이 모두 남에게 읽힐 것을 의식한 상태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흑산도견문인 「남정일기(南征日記)」(1775), 금강산기행인 「자경지함흥일기(慈慶志咸興日記)」 등이 모두 객관적인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다만 「열하일기」(1780)의 경우 나름대로의 독특한 소재를 자유롭게 수용하면서 적극적인 자기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여행일기의 백미로 꼽힌다. 단순히 경험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을 자기의 논리로 재구성하고 체계화함으로써 일기 차원을 넘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실학사상서로 평가받는다.
여행일기가 아니고 사건의 시말을 기록한 일기에서는 기록자의 개인적 성격과 내면이 보다 실체적으로 드러난다.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을 통하여 기록자가 자기 의식을 여과없이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이(李珥)가 명종 20년(1565)부터 선조 14년(1581)까지 조정의 시정을 기록한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각 사건에 대한 율곡의 견해가 곡진하게 드러난다. 광해군이나 선조 때의 사건을 다룬 무수한 일기들은 기록자의 견해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사건 선택의 시각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여행일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 후기 일기는 특이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일기 혹은 녹이라는 제목을 가진 것 중 상당수가 이른바 4대 사화 및 인조반정, 선조 · 광해군 시대의 정치사, 임진왜란과 두 번에 걸친 청나라와의 전쟁 등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주로 정치적인 사건에 대한 관심의 표현인 것인데 『대동야승』 · 『패림』의 대부분은 이러한 종류의 일기모음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일을 다룬 「산성일기(山城日記)」(羅萬甲)처럼 개별적인 문집으로 존재하는 것들도 그렇다. 「계축일기」 · 「한중록」 등도 모두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식된 정치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기류는 사건에 대한 기록자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사 · 정치사의 자료로 매우 귀중하게 이용된다. 정치사적 주제를 다루는 일기는 내밀하고 인간적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있고 문학적 감동력이 약화되게 마련인데, 「한중록」 · 「계축일기」 등은 사건 당사자로서의 감정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감수성이 예민한 여성기록자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비통한 정치 상황에 처한 일기의 기록은 19세기,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김하락정토일록(金河洛征討日錄)」은 대한제국 말기 의병대장이었던 김하락(金河洛)이 1895∼1896년간 경기도 이천 · 광주 지방과 경상북도 안동 · 의성지방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기까지의 진중기록이다. 이러한 의병일기는 20세기에 접어들어 만주로 배경이 확장되면서 독립군일기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奎)의 「용연일기(龍淵日記)」(‘용연김정규일기’라고도 함.)로서, 저자가 1907년 3월부터 1921년 11월까지 약 15년간 독립운동을 하면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는 ‘일기야사(日記野史)’ 혹은 ‘일기’라는 표제를 부치면서 일기를 써갔는데, 자기의 체험이 역사기록을 보완해 주기를 바라는 의식을 가지고 써 내려갔고, 그 결과 이 일기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일기가 대대로 이어지면서 당대의 사회상을 기록한 특이한 예도 이 시대에 등장하는데, 「저상일월(渚上日月)」이 그 예이다. 「저상일월」은 1834년 박등녕(朴得寧)이 시작하여 그의 4대손인 영래(榮來)가 1950년까지 기록하여 약 120년간 경상북도 예천지역에서 체험한 정치, 사회, 문화상이 만화경으로 그려져 있다.
일기가 사회적 · 정치적 사건을 기록하는 데에서 벗어나 개인만의 독특한 체험과 느낌을 기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흐름은 20세기에 접어들어서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명의 개인이 쓴 것 중 알려진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고, 서양의 경우처럼 유명작가들의 일기가 알려져 있다. 김광섭(金珖燮)의 「옥중일기」, 이광수(李光洙)의 「춘원일기」, 이병기(李秉岐)의 「가람일기」가 특히 유명하다. 공인으로서 뿐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세세한 일까지도 적고 있어 작가의 섬세한 시각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적인 친근감을 깊이 불러일으킨다.
일기는 자기만의 개인적인 내면기록으로 나아갈수록 공개될 수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기의 본질이다. 일기를 쓰는 것은 다른 글처럼 결코 공개적인 문학행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근세의 인물이나 생존하여 있는 사람들의 일기는 쉽게 공개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일기는 현재의 기록이되, 시간적으로는 늘 과거속에 묻혀서만 세인의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크게 알려진 일기가 별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개인의 개성이 중시되면 될수록 이러한 경향은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