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의 난 ()

고려시대사
사건
1374년,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의 목호(牧胡: 몽골의 牧子)들이 일으킨 반란.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374년 7월
종결 시기
1374년 10월
발생 장소
제주도
관련 국가
고려, 몽골제국, 명
관련 인물
최영, 오계남, 염흥방, 지윤, 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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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목호의 난은 1374년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의 목호(牧胡)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목호란 말을 키우는 몽골인들을 뜻하는 말로, 몽골 제국에서 제주도에 설치한 목마장에서 일하던 몽골인들을 가리킨다. 몽골 제국이 무너진 후 고려 정부는 제주도의 말을 명나라에 보내기로 약속하였는데, 제주 목호들은 이 결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2만 5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정의
1374년,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의 목호(牧胡: 몽골의 牧子)들이 일으킨 반란.
역사적 배경

1273년(원종 14), 몽골 제국은 제주도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한 후 이곳에 탐라 군민총관부(耽羅軍民摠管府)를 설치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어 직할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1276년(충렬왕 2)에는 목마장(牧馬場)을 두고서 몽골인 목자(牧子), 즉 목호(牧胡)를 보내 말을 기르게 하였다. 1295년(충렬왕 21)에는 고려 조정에서 제주목(濟州牧)을 두어 제주도에 대한 행정적인 관할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제주도 안의 목마장과 거기서 기르던 말의 소유권은 여전히 몽골 측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공민왕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공민왕 때가 되면 목호들은 고려 정부의 반원 조치에 반발하여 몇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개경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은 제주에 부임하는 족족 살해당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제주에서 직접 원에 예속될 것을 청원한 데 응하여, 원에서 탐라만호(耽羅萬戶)를 임명하여 파견하고 기존에 고려에서 임명한 만호를 살해한 일도 있었다. 1367년(공민왕 16)에도 고려와 몽골 제국은, 제주의 행정은 고려 측이 관할하고 목마장에서 산출되는 말은 몽골 측에 보내기로 한 합의를 재확인하였다. 1368년(공민왕 17)에 건국하고서 곧바로 몽골 제국을 북방으로 몰아낸 명나라는 과거 몽골 제국이 깊이 관여했던 제주도의 목마장과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그때까지와 같이 제주도 자체는 고려가 차지하되, 과거 몽골 측에 보내던 말은 명나라 조정에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목호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경과 및 결과

1372년(공민왕 21) 4월, 공민왕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오계남(吳季男)을 명나라에 보내 제주의 말을 바치기로 하여, 우선 유지별감 겸 간선어마사(宥旨別監兼揀選御馬使) 유경원(劉景元)을 제주에 보내 말을 골라오게 하였다. 이때 목호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시데리비스) ·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초쿠투부카) · 관음보(觀音保)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유경원과 목사 겸 만호(牧使兼萬戶) 이용장(李用藏), 권만호(權萬戶), 안방언(安邦彦) 등을 죽였다. 그러나 곧이어 그해 6월, 제주의 토착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죽이고서 고려 조정의 명을 받겠다고 하며 말을 바쳐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안무사(按撫使)를 파견하였고, 그로부터 적어도 1년 이상 제주는 고려 조정의 통제에 잘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사태가 본격화된 것은 1374년(공민왕 23)의 일이었다. 그해 4월, 명나라에서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 등을 보내와서 고려에 말 2천 필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한방언(韓邦彦)을 제주에 보내 말을 취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목호들은 “우리가 어찌 감히 세조 황제(世祖皇帝)께서 풀어먹이신 말을 대명(大明)에 바칠 수 있겠는가?”라며 반발하면서 겨우 3백 필을 내놓을 뿐이었다. 명나라 사신은 당초 요구한 2천 필이 아니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결국 7월 고려 정부는 목호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영(崔瑩)을 양광 · 전라 · 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 밀직제학(密直提學) 염흥방(廉興邦)도병마사(都兵馬使), 삼사좌사(三司左使) 이희필(李希泌)을 양광도상원수(楊廣道上元帥), 밀직(密直) 임견미(林堅味)부원수(副元帥),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 지윤(池奫)을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 동밀직사사(同密直司事) 나세(羅世)를 부원수,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김유(金庾)를 삼도조원수 겸 서해 · 교주도도순문사(三道助元帥兼西海交州道都巡問使)로 삼아 각각 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이때 동원한 군사가 2만 5600여 명에 전함은 314척에 이르렀다. 이들 군사는 8월 12일에 진도(珍島)에 집결하였다가 28일 제주에 상륙하였다. 고려 정부군과 제주 목호들은 제주도 거의 전역에서 매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목호들은 지금의 서귀포시 법환동 앞바다의 범섬으로 들어가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자결하였다고 한다. 전투는 대략 9월 말쯤에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은 목호 100여 명을 생포하고 목사와 안무사를 새로 임명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하는 한편, 말 1700여 필을 뽑아 개경으로 돌아왔다. 작전의 총사령관이었던 최영이 제주를 떠나 목포에 도착한 것은 그해 11월 3일의 일이었다.

의의 및 평가

목호의 난은 몽골 제국이 무너지면서 그들이 관할하던 제주의 말과 그를 관리하던 목호들의 향배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이었다. 목호들은 새로 등장한 명나라에 자신들이 기르던 말을 바치기를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고, 고려는 이를 계기로 제주도에 대한 관할권을 확정하기 위해 거의 총력을 기울여 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우왕 때에도 목호의 잔당들의 반발은 간간이 이어졌으나 이전과 같은 대규모 반란은 없었다. 이후 1387년(우왕 13)에 이르면 제주는 완전히 고려에 복속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이문(吏文)』

단행본

김태능, 『제주도사논고』(세기문화사, 1982)
김일우, 『고려시대 탐라사 연구』(신서원, 2000)

논문

배숙희, 「원나라의 탐라 통치와 이주, 그리고 자취」(『중국사연구』 76, 중국사학회, 2012)
이강한, 「13~14세기 고려와 원제국의 ‘탐라(제주) 정책’」(『한국학논총』 48,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7)
정동훈, 「초기 고려-명 관계에서 제주 문제」(『한국중세사연구』 51, 한국중세사학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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