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후기 강릉도병마사, 판개성부사, 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공민왕에 반대하는 세력이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德興君)을 고려국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절개를 지켜 이에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귀국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추성익조공신호(推誠翊祚功臣號)를 받았다.
1365년 원나라에 덕흥군을 송환해 줄 것을 청하려고 하였으나, 원제(元帝)가 이미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밀직사의 동지사)가 되었다. 1366년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로서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 제주의 목호(牧胡)를 토벌하였다.
1373년(공민왕 22)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 서해도도순문사(西海道都巡問使)로서 손수경(孫守卿) 등과 반란음모에 관련되었다고 하는 충혜왕의 얼자(孽子) 석기(釋器)를 체포하였다.
1374년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서북면조선사(西北面造船使)로 임명되었고,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교주도도순문사(三道助戰元帥兼西海交州道都巡問使)가 되어 다시 반란을 일으킨 제주를 평정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개성부의 판사)가 되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79년(우왕 5) 왜구가 연안부(延安府)에 침입하자, 나세(羅世)와 함께 전함을 이끌고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 적선 2척을 격파하였다.
이 해 장씨(張氏: 우왕의 유모)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최영(崔瑩)과의 알력으로 합포(合浦)에 장류(杖流)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381년 문하평리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로 떠났으나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그 뒤 문하찬성사로 승진, 1382년 세공물(歲貢物)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로 출발했으나 역시 요동에서 막혀 가지 못하였다.
1383년 성절사로 갈 때는 해로를 이용했으나 길이 험해 기일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대리(大理)에 귀양갔다가 1385년 석방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아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386년(우왕 12) 가산을 몰수당하고 다시 순천부(順天府)로 유배 도중 경천역(敬天驛)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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