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5년(공민왕 14) 순군경력(巡軍經歷)으로서 상호군(上護軍) 이득림(李得霖)과 함께 신돈(辛旽)의 명으로 최영(崔瑩), 평리(評理) 양백익(梁伯益), 판밀직(判密直) 박춘(朴椿) 등을 국문하였으며, 1372년(공민왕 21)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난징[南京]에 가 말을 바치고 돌아왔다.
그 뒤 명나라에서 탐라(耽羅: 지금의 제주도)의 말을 가져가기 위하여 비서감(秘書監) 유경원(劉景元)을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로 삼아 그와 함께 탐라에 보냈는데, 탐라에서 말을 방목하고 있던 달단(韃靼)들이 유경원과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용장(李用藏), 판관(判官) 문서봉(文瑞鳳) 등을 모두 잡아 죽였다.
또 그보다 먼저 상륙한 궁병(弓兵) 300여 명을 모두 죽이니,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또 예부상서로서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탓으로 명나라 수도에 말 6필을 바치고 돌아왔다.
뒤에 한때 북방을 지키는 신하로서 정료위(定遼衛: 명나라가 요양에 설치한 지방행정기구) 사람을 함부로 죽여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긴장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우헌납(右獻納) 이첨(李詹)·좌정언(左正言) 전백영(全伯英)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에 파견되어 호구를 조사하였고, 얼마 뒤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북원(北元)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82년 덕성군(德城君)으로서 경상도도안무사(慶尙道都按撫使)에 기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