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관북리유적은 부여읍내의 북쪽에 있는 부소산의 남쪽 및 서쪽 기슭 일대에 위치한다. 19821992년에 걸친 충남대학교박물관의 조사와 20012008년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성격이 일부 확인되었다. 1983년 9월에 충청남도 기념물 전백제왕궁지로 지정되었다. 이후 왕궁지로서 이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2001년 2월 5일에 사적으로 다시 지정되었으며, 발굴조사를 마친 구역은 정비되었다.
1982년 이래의 발굴조사를 통해 왕궁 건설과 확장을 위해 조성한 성토(盛土) 대지와 그 위에 만들어진 대형 전각건물 등 기와로 기단을 꾸민〔瓦積基壇〕건물터, 남북 · 동서방향의 도로, 축대 및 배수로, 목곽수조(木槨水槽) 및 기와 배수관, 연지(蓮池),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대지 조성 이전에 왕실 수공업 생산지였음을 보여주는 철기, 금 및 금동제품 제작소 등 공방(工房)시설과 함께 나무와 돌로 구축한 지하곳간이 밀접한 저장시설단지 등도 확인되었다.
왕궁터의 연못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옛 국립부여박물관) 앞 광장에서 발견되었는데, 호안(護岸)은 막돌을 이용하여 4∼5단 높이로 쌓아올렸다. 동서가 긴 장방형으로, 규모는 남북 길이 6m, 깊이 1m 내외의 크기이며, 동서 길이는 7m가량 조사가 이루어졌다.
연못 안의 퇴적토는 크게 3개층으로 구분되는데, 최하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목간(木簡), 금동제귀걸이, 기와 및 토기편이, 중간층은 흑회색점질토층으로 벼루, 등잔, 바구니 등이, 최상층에서는 개원통보(開元通寶), 철제창, 철제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
연못에 인접한 동쪽 지역에서는 남북과 동서로 교차된 도로망 유적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남북 도로는 연못 동쪽 30m 지점을 기점으로 개설되어 있는데, 너비 10.9m, 남북 길이는 약 40m가 확인되었다.
도로의 가장자리에는 배수로 시설이 있는데, 너비 45㎝ 간격으로 두께 5㎝ 정도의 판자를 양단에 세워 만들었으며, 서편 도랑의 경우 마지막 시기에는 막돌을 이용하여 너비 20㎝ 정도의 배수로로 좁혀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동서 도로는 너비가 3.9m로서 가장자리에는 역시 배수로시설이 있는데, 내부는 암수키와가 인위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도로의 교차지점에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이용하여 암거(暗渠)시설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너비 120㎝, 길이 130㎝의 화강암 판돌 3매를 남북방향으로 이어서 깔아 놓았으며, 그 총 길이는 동서 도로의 너비와 같았다. 한편 남북 도로는 부여 중심에 있는 정림사(定林寺)의 중앙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기단과 석축시설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동편에 인접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건물터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와적기단(瓦積基壇)이었고, 석축시설은 그 높이가 80㎝에 이르는 것으로 왕궁의 북쪽 한계선을 밝혀주는 자료로 생각되는데, 문화재연구소 안의 뜰로 계속하여 이어진다.
석축시설의 서쪽에서는 석축으로 된 조그마한 샘이 발견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와 석축시설 사이에는 도로와 배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터 기단과 배수로 내부에서는 토기 표면에 얼굴무늬가 있는 것〔人面文土器〕, 토기의 태토(胎土)가 매우 정선된 완형토기들, ‘北舍(북사)’명이 있는 항아리, 연꽃무늬수막새, 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철제품이 발견되었다. 얼굴무늬가 있는 토기편은 백제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완형토기는 규격에 따른 제품생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표면에 ‘七(칠), 八(팔)’ 등의 숫자가 오목새김된 것도 있다.
공방터는 남북 도로 유적에서 동편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동서가 긴 장방형 움〔竪穴〕내부에 노(爐)시설이 있었던 곳과 가로로 된 손잡이가 상하에 각각 4개씩 부착된 토관을 이용하여 만든 집수구시설이 있었다. 움 내부에서는 철제편들과 석제추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공방시설이나 창고시설이 폐기되고 정연한 배치의 도로, 기와기단건물, 연못 등으로 대체된 시기는 성토층 속에 포함된 중국 자기 등을 통해 볼 때,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은 사비도성의 점진적 확대에 따른 궁성 중심 권역의 확장과 관련될 개연성이 높다.
그동안 관북리유적에서는 금동광배, 도가니, 다양한 목제품과 목간, 수부(首府)명 기와, 각종 인장와(印章瓦), 연화문 수막새, 사람얼굴이 그려지거나 찍힌 토기, 중국제 자기, 과일씨앗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왕궁의 존재와 관련하여 7칸×4칸으로 동서 길이 35m, 남북 길이 18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물터가 주목된다. 이 건물은 기와 파편을 다량 섞어 흙을 다지며 터를 돋은 후에 초석이 놓일 자리에 흙을 겹겹이 다져 쌓은 한 변 2.4m 안팎인 방형의 적심 시설을 총 36개나 만들었다. 이와 거의 똑 같은 규모와 형태의 건물이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도 확인되었는데, 4단으로 구획된 전각구역(殿閣區域) 중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는 중심 건물이다.
이외에 수부명 기와도 부여 관북리유적과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만 나타나고 있어 서로 성격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부만 발굴조사된 부여 관북리유적의 구조는 이미 조사가 거의 완료된 익산 왕궁리유적의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건물과 유물을 통해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부소산 기슭이 왕궁의 일부였음은 분명하지만 정전(正殿) 등이 위치한 중심구역과 왕궁의 전체적인 범위는 추정에 머물고 있다.
관북리유적에서 발굴조사된 다양한 유구를 통해 단편적이지만 사비도성에서의 왕궁의 위치와 구조, 그리고 조성 과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도로 구획과 대지 조성으로 이루어진 왕궁의 확장을 통해 사비도성 도시 계획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왕궁의 정확한 위치와 전체적인 범위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앞으로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궁장(宮牆: 궁을 둘러싼 담장), 성토대지, 건물과 도로의 흔적 등을 근거로 왕궁 내 주요 시설의 위치와 범위를 확정해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