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선림원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사원이다. 선림원이라는 이름은 이칭이며, 조선 후기 문헌에서는 사림사 또는 선림원, 선림사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계에서는 염거가 머물렀던 억성사라고 본다. 세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나말 여초 때 산사태로 인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와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 양양 선림원지 석등, 양양 선림원지 승탑이 있다.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사원.
발굴경위 및 결과
2015년 3차 발굴 조사에서는, 선림원(禪林院)의 승방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광배와 대좌를 온전히 갖춘 금동보살입상을 발견하였다. 금동보살상은 높이 70㎝ 내외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보살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하다. 2024년 12월 26일에 양양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襄陽 禪林院址 出土 金銅菩薩立像)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에 앞서 1948년 11월에 804년[정원(貞元) 20]에 만든 동종이 이 절터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동종이 선림사에서 만들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발굴 조사 결과, 나말 여초 때 산사태로 인해 굴러떨어진 돌무더기가 선림원 건물을 일시에 덮어 버려 폐사되었다고 추정되었다.
명칭 유래와 변천
억성사는 도의(道儀)의 제자이자 체징(體澄: 804~880)의 스승인 염거(廉巨: ?~844)가 머물던 사원이다. 체징이 억성사에서 염거로부터 법인을 전수받았다. 다만 체징은 837년(희강왕 2) 동학인 정육(貞育), 허회(虛會) 등과 함께 유학을 떠나 840년(문성왕 2) 귀국한 뒤에는 억성사에 머물지 않았다. 억성사를 크게 중창한 이는 홍각이다. 홍각은 함통(咸通: 860~874) 말년에 다시 억성사에 가서 금당[金殿]과 누각[香榭]을 완성하고, 이곳에서 880년(헌강왕 6) 10월 21일 새벽에 입적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 「양양 선림원지 종명(襄陽 禪林院址 鍾銘)」
-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논문
- 임영애, 「새로 발견된 선림원지 금동보살입상, 통일기 신라 보살상의 명작」(『미술사학연구』 308, 한국미술사학회, 2020)
- 장정민, 「신라 최고 ‘금동불상’이 발견된 선림원지 유적」(『한국고고학저널2015』, 국립문화재연구소, 2015)
-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성사지의 추정」(『사학연구』 55·56, 한국사학회, 1998)
주석
-
주1
: 권덕영, 「홍각선사탑비문을 통해 본 신라 억성사지의 추정」(『사학연구』 55·56, 한국사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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