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원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사원이다. 선림원이라는 이름은 이칭이며, 조선 후기 문헌에서는 사림사 또는 선림원, 선림사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계에서는 염거가 머물렀던 억성사라고 본다. 세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나말 여초 때 산사태로 인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와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 양양 선림원지 석등, 양양 선림원지 승탑이 있다.
양양선림원지(襄陽禪林院址)에 대한 발굴 조사는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1985년에 1차, 1986년에 2차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2015년에는 한빛문화원구원에서 3차 발굴 조사를 하였다. 현재 이 절터에는 1966년 9월 21일 동시에 보물로 지정된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와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襄陽 禪林院址 三層石塔), 양양 선림원지 석등(襄陽 禪林院址 石燈), 양양 선림원지 승탑(襄陽 禪林院址 僧塔)이 있다. 1차 발굴 조사 때 수습한 홍각선사탑비의 비편이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조선시대에 양양부(襄陽府)에서 보관해 오던 것을 1914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겼던 비편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2015년 3차 발굴 조사에서는, 선림원(禪林院)의 승방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광배와 대좌를 온전히 갖춘 금동보살입상을 발견하였다. 금동보살상은 높이 70㎝ 내외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보살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하다. 2024년 12월 26일에 양양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襄陽 禪林院址 出土 金銅菩薩立像)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에 앞서 1948년 11월에 804년[정원(貞元) 20]에 만든 동종이 이 절터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동종이 선림사에서 만들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발굴 조사 결과, 나말 여초 때 산사태로 인해 굴러떨어진 돌무더기가 선림원 건물을 일시에 덮어 버려 폐사되었다고 추정되었다.
‘선림원’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 현재의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에 창건되었던 사원의 이칭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후기의 문헌들에서는 이 사원을 ‘사림사(沙林寺)’, 또는 ‘선림원’, ‘선림사(禪林寺)’라고 부르고 있다. 홍경모(洪敬謨: 17741851)의 『관암전서(冠巖全書)』에서는 “신라설산선림원홍각선사비(新羅雪山禪林院弘覺禪師碑)가 양양 사림사에 있었다”고 전한다. 역사학자 권덕영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홍각(弘覺: 814880)의 비가 파괴된 후 비편에서 확인되는 구절, “선림을 두루 돌아다니다가[遍詣禪林]”에서 ‘선림(禪林)’을 사원명으로 오인하여 선림원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하며, 이 사원의 신라 때 명칭은 억성사(億聖寺)라고 주1
억성사는 도의(道儀)의 제자이자 체징(體澄: 804~880)의 스승인 염거(廉巨: ?844)가 머물던 사원이다. 체징이 억성사에서 염거로부터 법인을 전수받았다. 다만 체징은 837년(희강왕 2) 동학인 정육(貞育), 허회(虛會) 등과 함께 유학을 떠나 840년(문성왕 2) 귀국한 뒤에는 억성사에 머물지 않았다. 억성사를 크게 중창한 이는 홍각이다. 홍각은 함통(咸通: 860874) 말년에 다시 억성사에 가서 금당[金殿]과 누각[香榭]을 완성하고, 이곳에서 880년(헌강왕 6) 10월 21일 새벽에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