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여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경상남도 진주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한 문인.
이칭
공실(公實)
부사(浮查), 야로(野老), 부사(桴槎)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6년(명종 1)
사망 연도
1632년(인조 10)
본관
창녕(昌寧)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
주요 저서
부사집(浮査集)
내용 요약

성여신은 조선 후기 16세기 중반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진주를 근거로 하여 활동한 문인이다. 남명 조식의 문인이면서 한강 정구는 물론 경상도 전역의 학자들로부터 다양하게 학문을 배웠다. 과거를 통해 중앙 조정에 관료로 진출하지 않은 채 일생을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진주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한 문인.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查) · 야로(野老) · 부사(桴槎)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성안중(成安重), 할아버지는 성일휴(成日休), 아버지는 경기전(慶基殿) 봉사(奉事) 성두년(成斗年)이다.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는 충순위(忠順衛) 변원종(卞元宗)의 딸이다. 큰형은 성여충(成汝忠), 작은형은 성여효(成汝孝)이고, 성여신이 막내이다.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사신(朴士信)의 딸이다.

주요 활동

1560년(명종 15) 약포(藥圃) 정탁(鄭琢)에게 주1를 배웠고, 1563년에는 구암(龜巖) 이정(李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64년 향시(鄕試)에 입격하였고, 다음 해 밀양박씨와 혼인하였다.

1568년(선조 1) 동료들과 단속사(斷俗寺)에서 『삼가귀감(三家龜鑑)』의 목판 및 오백나한(五百羅漢)사천왕상(四天王像)을 불태웠다.

그리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가 『상서』를 배운 조식의 문인이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교유하였다. 응석사(凝石寺), 쌍계사(雙磎寺) 등지에서 공부하였고, 1581년(선조 14)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방문하였다. 1582년 곽재우(郭再祐), 이대기(李大期)와 사굴사(闍崛寺)에서 공부한 후 1585년 진주로 돌아왔다.

1600년 부사정(浮査亭)과 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하였다. 1609년( 광해군 1)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613년 별시(別試) 주2에 장원급제하여 상경했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하였다. 다음 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에 대하여 상소한 정온(鄭蘊)이 하옥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위해 의령소회(宜寧疏會)에 참여하였다.

1616년 금산동약(琴山洞約)을 만들고, 양몽재(養蒙齋)와 지학재(志學齋)를 세워 후학을 교육하였다. 같은 해 가을, 정대순(鄭大淳), 박민(朴敏), 문홍운(文弘運), 이중훈(李重勳)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1632년 11월 부사정 양직당(養直堂)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622년 『진양지(晉陽志)』를 편찬하였고, 1632년 「침상단편(枕上斷編)」과 「동방제현찬(東方諸賢贊)」을 편찬하였다. 1785년(정조 9) 후손 성동익(成東益) 등이 안정복(安鼎福)의 서문을 받아 문집을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1719년(숙종 45) 임천서원(臨川書院)주3이 봉안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부사집(浮査集)』
『사마방목(司馬榜目)』
『순암문집(順菴文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術)』

단행본

남명학연구원, 『부사 성여신』(예문서원, 2015)

논문

김종구, 「부사 성여신의 유람을 통해 본 은일관 및 경세관과 그 의미」(『우리말글』 76, 우리말글학회, 2018)
최석기, 「成汝信의 「遊頭流山詩」에 대하여」(『남명학연구』 49,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6)
주석
주1

유학(儒學) 오경(五經)의 하나. 공자가 요임금과 순임금 때부터 주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수집하여 편찬한 책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주2

식년마다 보이던 과거를 통틀어 이르던 말. 이에는 문과, 무과, 생원 진사과,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따위가 있었다.    우리말샘

주3

단(壇), 묘(廟), 원(院), 절 따위에 모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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