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방은 세를 내고 빌려 쓰는 방이다. 총가구 수보다 총주택 수가 크게 부족한 도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셋방에는 전세방·보증부월세방·사글셋방·월세방이 있다. 셋방살이는 도시로 인구 집중이 본격화된 1920년대 이후 나타났다. 정부의 다양한 주택 정책에도 여전히 주택부족은 해결되지 않았다. 현재는 주택보급률 급증으로 주택 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셋방 문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택 소유 편중, 주거 비용 급증, 재개발로 인한 원주민의 주거 생존권, 저소득층의 주거 복지권 문제와 투쟁 등의 문제는 반복되고 있다.
주택 공급이 부족하거나 주택을 마련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한 주택의 일부를 빌려 쓰는 제도이다. 통상 총 가구 수보다 총 주택 수가 크게 부족한 도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빈 땅이 많고 주택건축이 용이한 농촌의 현상은 아니다. 현재는 주택보급률이 전체 가구 수를 넘어서지만, 비싼 주택 및 주거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주택의 일부를 빌려 쓰고 있다. 주택 한 채의 전부를 세내는 경우는 셋방에 해당되지 않는다.
셋방에는 대표적으로 전세방(傳貰房) · 보증부월세방(保證附月貰房) · 사글세방(朔月貰房) · 월세방(月貰房)이 있다.
① 전세방: 계약한 액수의 돈을 미리 지불하고 입주하여 살다가 퇴거할 때 그 금액을 되찾아 나오는 방식으로, 이 경우 실질적인 방세는 입주할 때 낸 금액의 이자이다. 우리나라의 셋방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다.
② 보증부월세방: 보증금을 내고 별도로 매월 월세를 지불하는 형식으로, 월세가 제때에 지불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월세분의 10배 정도의 금액을 입주할 때 보증금으로 내는 방식이다. 이 경우 실질적인 방세는 보증금의 이자와 매월 내는 월세의 합계액이다.
③ 사글세방: 매월의 월세액을 정한 뒤 미리 1년분 정도의 월세 합계액을 선세(先貰)로 내고 그 금액을 매달 삭감해 가는 제도이다. 사글세액의 잔액이 떨어질 때가 계약이 만료되는 달로서,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퇴거해야 한다. 만일 계약기간 내에 퇴거할 경우에는 삭감된 액수의 잔액을 되찾아 갈 수 있다. 셋방 중에 가장 가혹한 제도로 지적되고 있다.
④ 월세방: 방세를 매월 지불하는 셋방이다. 이 제도가 가장 정상적인 것이지만 셋방 현실에서는 오히려 예외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이상의 네 가지 형태 외에도 지금은 없어졌지만 일제강점기엔 ‘행랑살이’라는 셋방 제도의 변형이 있었다. 이는 큰 주택의 대문채에 붙어 있는 행랑에 하층 영세민이 세 없이 들어가 살면서, 주인집에 일이 있을 때 주인집 요청에 따라 무상 또는 약간의 보상이나 음식 제공을 대가로 노동을 제공해 주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행상이나 품팔이를 하는 피용주거제도(被傭住居制度)였다. 이 경우 방세는 부정기적으로 제공하는 노동력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셋방제도가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조선시대의 여러 법전에는 셋방에 관한 규정이 없으며, 고문서 중에도 많은 토지 · 가옥 계약문서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 중 셋방에 관한 계약문서가 한 장도 없는 것으로 보아, 셋방살이는 개항기 이후 특히 도시로 인구 집중이 본격화된 1920년대 이후의 현상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일제시대의 『조선총독부통계연보』나 『경기도통계연보』에도 주택 사정을 알려 주는 통계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당시의 『조선연감』의 ‘경성부란(京城府欄)’에 기재된 서울의 주거수와 가구수 통계를 통해 당시의 주택 부족상황을 짐작할 따름이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0년대 초부터 도시 주택사정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제2차세계대전기인 1940년대에는 극도로 주택이 부족하였다. 이 밖에도 당시의 주택사정 및 셋방살이의 비참함을 알 수 있는 비공식적인 자료가 많이 있다.
잡지 『개벽』 제21호에는 1920년 당시 서울의 가구수가 3만 8,982호인데 그 중 3분의 1이 넘는 1만 4,000호 정도가 행랑살이 가구일 것이라는 논설이 실려 있으며, 당시의 신문기사들 중에는 빈민들을 위하여 경성부가 마련한 헐값의 집단셋집인 ‘부영장옥(府營長屋)’의 실태와 주민들의 생활상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광복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도시의 셋방살이 가구는 한층 증가하였다. 이는 해외로부터의 귀환동포와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 농지개혁과 농촌 경제사정의 악화에 따른 이농민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대도시 인구집중이 급격히 일어난 데 반하여, 주택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뒤이어 1960년대 이후 급격히 전개된 산업화는 농촌인구를 가속적으로 도시로 배출시켜 도시의 주택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1957년 12월에 실시한 한국은행 조사부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의 총 가구 수는 29만 8,840호인데 총 주택 수는 18만 5,289동으로 그 부족 수인 11만 3,551호가 셋방살이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결과를 보면 전세는 40.5%, 보증부월세 13.5%, 사글세 25.8%, 월세 20.2%로 셋방이 구성되어 있었고, 방 한 칸의 세액이 가장 비싼 곳은 중구로 월세로 환산하여 평균 6,409환이고, 가장 싼 곳은 마포구로 평균 2,248환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주택 부족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1967∼1971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부터 주택건설에 역점을 두었는데, 특히 197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도시의 아파트 건설은 셋방 해소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계속 늘어나는 주택투자에도 불구하고 급증하는 인구성장과 대도시 인구집중으로 인한 주택수요가 주택개발 추세보다 훨씬 앞질렀기 때문에, 주택부족률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70∼1980년 주택부족문제가 날로 악화되면서 단독주택 일부를 임대하여 거주하는 '셋방살이'가 서민들의 일반적인 주거방식이 되었으며, 단독주택에 두 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이른바 '다세대거주 단독주택'은 보편적 주택형태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쳐 주택 총수가 증가했지만, 인구 역시 동시에 증가하여 여전히 주택은 부족하였다. 1980년 전국 주택부족률은 36.1%, 서울의 경우 49.2%로 증가된 것을 비롯하여 부산 · 대구 · 인천 등 대도시도 40%이상의 주택부족률을 나타내었다. 결국 부족분만큼의 숫자는 셋방살이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늘어나는 주택부족률과 급격한 주택가격 상승은 주택의 종류, 소유형태, 주거비 부담에 영향을 미쳤다. 주택가격 상승, 특히 지가 상승으로 인하여 단독주택 비율은 점차 줄고, 그 대신 아파트 비율이 1970년의 4.1%에서 1985년에는 21.3%로 증가하였다. 또한 자가율 역시 지속적인 하락 추세를 보여 전국의 자가율은 1975년의 63.5%에서 1985년에는 53.3%로, 서울의 경우는 46%에서 40.6%로 감소되었다.
그 반면에 셋방살이 가구의 비율은 더욱 커졌는데 전국적으로는 전세가구가 대폭 늘어난 반면, 서울에서는 월세가구가 늘어났다. 다시 말하면 악화되는 주거비 부담 때문에 서울의 경우에는 전세방 얻기도 힘들게 된 것이다. 셋방살이에는 가구별 방 수의 부족은 물론이고 부엌 · 화장실 · 상하수도 등 주거 조건에도 문제가 있었다. 동시에 여러 가구가 한 집에서 공동 거주함에 따라 초래되는 인간관계의 마찰, 사생활의 침해, 정신위생상의 악영향 등 많은 문제점과 애환을 빚었다.
1980년대 말부터 셋방문제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즉 1988년에 들어선 제6공화국이 주택 200만 호 건설에 착수하였을 뿐 아니라 그 중 30%에 해당하는 60만 호분을 영구임대 · 장기임대 주택으로 충당한 것이다.
한편 주택 수 증가를 위해 이른바 다가구(多家口)주택이라는 것을 장려한 것이다. 1960년대∼70년대 서울 · 부산 · 대구 등 대도시 변두리에 수없이 건축된 것은 단층 · 평옥의 이른바 ‘집장수 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6공화국 정부는 이 단층 평옥의 집장수 집을 3∼5층으로 개조하여 여러 가구가 층별로 공동 거주하는 것을 장려한 것이다.
주택 200만 호 건설과 다가구주택 건설을 통하여 많은 셋방살이가 해소되었다. 1995년 대도시 주택보급률은 80%전후였고, 주택건설은 계속 활발히 추진되어 주택 부족, 셋방살이 문제는 점차 해소되어 갔다.
주택보급률은 점차 증가하여, 통계청에 따르면 주택보급률은 2005∼2007년에 각각 98.3%, 99.2%, 99.6%에 이어 2008년 100.7%로 100%선을 넘었고 2009년 101.2%, 2010년 101.9%(전국 주택수 1,466만 가구)로 올라섰다. 주택보급률에 비해 아직까지 10가구 중 4가구는 무주택으로 나타나 1인 2가구 이상 소유의 편중 현상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최근에는 주택의 절대적 공급 부족에 기인한 셋방 문제는 드러나지 않지만, 주택 소유가 매우 편중되어 있고, 주택 비용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싸서 여전히 주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셋방살이와 관련하여 1980년대 중반기에 크게 대두된 사회문제는 철거지대의 세입자 대책이었다. 불량지구를 철거하여 재개발하거나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경우 토지 · 건물의 소유자에게는 적절한 보상금이 지급되거나 아파트 입주권이 부여되었는데 헐릴 가옥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에게는 적절한 보상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1984년 가을부터 목동 · 상계동 신시가지 조성, 서울역 양동 재개발현장 등에서 세입자들의 거센 집단시위가 전개되었다. 거주권도 생존권이니 정부가 책임지라는 시위였는데 일부 경우는 과격성으로 인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세입자 이주대책’이 결정 · 시행된 것은 1985년 3월 18일이었는데, 임대아파트 입주권(방 1개)과 이주보조금 지급, 지방이주 지원 중에서 희망에 따라 택일하는 방안이었다.
현재는 주택보급율 급증으로 예전같이 주택의 절대수 부족으로 인한 셋방 문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주택 소유 편중, 주거 비용 급증, 그리고 뉴타운 등 재개발로 인한 원주민의 주거 생존권, 저소득층의 주거 복지권 문제와 투쟁은 여전히 반복되는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