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

촌락
개념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 지리적 공간.
내용 요약

농촌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 지리적 공간이다. 전통 사회에서 인구의 대부분은 농촌에 거주하였고, 그들에게 농촌은 노동의 장소이자 일상 생활의 공간이었다. 근대화 및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이루어지며 농촌의 비중은 감소했다. 농촌은 도시와 구별되는 전통적이고 비익명적인 문화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미디어의 발달과 대중문화의 확산에 따라 도시와 농촌 문화의 유사성이 커지고 있다. 현재 농촌은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를 겪으며 사회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정의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 지리적 공간.
개설

농촌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 지리적 공간이다. 전통 사회에서 농촌은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삶과 노동의 장소였다. 전세계적으로 근대화산업화가 진행되고,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진행됨에 따라 농촌의 비중은 감소하고 있다. 도시화의 결과 북미와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농촌이 크게 축소되었고, 농민의 수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보면 농촌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 지리적 공간이며, 세계 인구의 70%는 여전히 농업에 종사한다.

서구 사회에서 농촌은 원래 ‘공터’의 의미를 지녔으며, 로마 시대에 이르러 ‘농촌성’을 가진 시골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농촌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은 도시의 관점에서 만들어지고 재생산되었는데, 그것들은 적어도 서양에서는 이중적이었다. 즉 한편으로 농촌은 위험하고 황량한 황무지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목가적 공간으로 묘사되었다. 농촌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이미지는 오늘날 도시인들이 농촌에 대해 가지는 관념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농촌은 주로 촌(村)으로 표기되었고, 다수의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의미했다. 『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농촌보다는 촌이라는 표현을 주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농촌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로 보인다. 예컨대 1895년에 발간된 사전인 『국한회어(國漢會語)』에 농촌이 수록되었고, 1904년 『 황성신문』에서 농촌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농촌은 농민이라는 행위자들의 관계망을 통해 지역 고유의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며,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중반 사회 과학자들은 도시와의 대조 속에서 농촌의 문화를 기술했다. 예컨대 농촌은 도시에 비해 인구 밀도가 낮고, 1차적 인간관계가 주를 이루고,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의 발달, 교통망의 확대, 여행 및 관광 활동의 증대 등에 따라 도시와 농촌 간의 문화적 차이는 많이 줄어들었다.

통계 및 정책을 위해서는 농촌에 관한 사회학적 또는 문화적 이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농촌을 엄격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농촌에 대한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규정은 법 제도에 의존한다. 국가들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농촌은 주로 지방자치법 시행령(대통령령 제25869호)에 의해 규정된다. 인구 및 산업 면에서 시(市)와 도농복합도시(都農複合都市)의 요건을 갖추지 않은 지역인 읍이나 면을 농촌으로 분류한다. 즉 행정구역상 동을 시로, 읍이나 면 지역을 농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진행된 빠른 도시화와 근대화에 따라 우리나라의 농촌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었으며, 농촌 자체의 분화도 일어났다. 이에 따라 농촌을 도시 · 농촌혼합 지역, 농업 · 농촌중심 지역, 인구과소낙후 지역 등으로 세분하고, 이를 정책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시도도 있다. 또한 대도시나 지역 중심도시와의 접근성을 기준으로 농촌 지역을 근교, 일반, 원격 지역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실제 세계의 농촌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농촌이 가지는 특수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근대화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한국 농촌은 마을 혹은 촌락 단위로 사회 활동이 이루어져 왔다. 또한 한국 농촌에서는 혈연적 관계가 강조되었다. 즉 동성동본의 인구가 특정 지역에 함께 거주하는 농촌 마을인 집성촌이 적지 않았다. 집성촌은 임진왜란 이후 증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 조선에서 진행된 유교의 보수화, 가부장 제도의 강화, 장자 상속제 등과 깊이 관련된다. 집성촌은 시제(時祭)와 같은 제사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해방 이후 산업화에 따른 대규모 이농과 농촌 과소화 때문에 적지 않은 집성촌이 사라져 왔다. 잘 알려진 집성촌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의 풍산 류씨(柳氏) 집성촌과 경상북도 영천의 영천 이씨(李氏) 집성촌 등이 있다.

역사적 변천

1. 전통 사회와 농촌

전통 사회에서 농촌은 매우 보편적인 사회 지리적 공간으로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했다. 일부 도시와 산촌 및 어촌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고, 그들의 주거와 노동의 공간이 농촌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한반도 농촌은 마을 혹은 촌락 단위로 사회 생활이 이뤄졌다. 비교적 자급자족적인 농가, 경작을 위한 마을 주민들 간의 협업, 그리고 정기적인 장터가 경제 활동의 기본 구조였다. 한국 농촌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는 마을이나 자연 부락을 관찰 단위로 이뤄진 것이 많다. 산업화 이후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큰 변화를 겪어 왔지만 정주 형태로서의 마을은 여전히 중요하다.

긴 시간틀에서 보면 농촌의 형성은 식량 조달 방식이 수렵 및 채취에서 경작으로 전환되면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한반도에서 농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1000년부터로 본다. 한국인의 주식인 벼농사가 시작된 것도 대개 이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농업을 통해 식량 생산이 안정화되면서 다수의 농가가 모여 살게 되고, 자연스럽게 마을이라는 주거 형태가 형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농업을 중심으로 구성된 마을과 촌락의 느슨한 집합체를 농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고대 국가의 성립은 농업 생산력 증가와 무관하지 않았다. 삼국시대 벼농사가 본격화되면서 식량 생산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났다. 더불어 국가 제도가 완비되고, 농촌 마을에 대한 통치가 체계화되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전반적인 농업 생산력 향상과 인구 증가는 행정 개편의 필요를 낳았다. 신라의 행정 체계는 669년 9주 5소경 105군 201현이었다가 757년에는 9주 5소경 120군 305현으로 확대되었다. 의 하위 단위로 이나 부곡을 두고, 촌주를 임명하여 농촌 지역에 대한 행정적 지배를 강화하였다.

고려는 지방 토호 세력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왕권을 유지하였다. 고려 왕조는 신라의 주군현 제도를 계승하였고, 지방의 호족 세력을 행정 체계 안에 포섭하고자 했다. 현 이하의 지방 단위를 향, 부곡, 소, 장, 처로 구별하여 농촌 촌락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다. 고려 왕조는 벼와 보리 등을 주곡물로 인식하고 권농 정책을 펼쳤고, 담세 계급인 자영농을 중시했다. 하지만 고려 중기 이후 대규모 농장 기반의 장원 제도가 왕권을 위협하게 된다. 13세기 후반에는 귀족이나 사원이 소유한 장원이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전국 촌락의 절반 정도가 장원 촌락으로 포섭되었으며 경작 노비가 급증하였다. 많은 자영농들이 토지를 잃고 전호로 전락하거나 유랑민이 되었다. 농촌사회는 혼란에 빠졌으며, 이는 고려 왕조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 왕조는 성립과 동시에 집권 관료 국가를 지향했고, 향리 출신의 신흥사대부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일률적으로 군현제가 도입되면서,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군현 이하의 향촌에 대해서는 오가통제(五家統制)에 기반한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농촌에 대한 통치를 시도했다. 실제 농촌의 통치는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체계와 전통적 재지사족 간의 협력과 타협을 통해 이뤄졌다. 새롭게 출범한 조선 왕조는 과전법을 실시하고, 중농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중농 정책은 와해되었고, 농민들은 가난하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농지는 소수의 양반층에 집중되었고, 광작농이 농지 규모를 넓혀가면서 자작농이나 작인층이 몰락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부농 10%가 전체 농지의 43%를 소유하는 토지 집중화가 나타났다.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고, 농촌의 불안정성이 높아졌다. 양반들은 지배 구조를 안정화시키고, 농민들의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기 위해 유교적 원리에 기반한 향약(鄕約)을 강화하였다. 한편 자발적이고 상호부조적 협동 조직인 촌계(村契), 혼상갑계(婚喪甲契), 공계(貢契), 두레, 품앗이 등도 농촌에서 발달했다.

일제강점기 농촌사회에서는 식민 권력을 농촌에 침투시키기 위한 행정 개편이 이루어졌다. 군과 향촌 자치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면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이는 촌락 내에 새롭게 성립된 관료제 질서와 전통적인 마을 자치 질서라는 이원 구조를 낳았다. 1914년 일제는 대대적인 행정 체계 개편을 단행하여, 기존 329개 군을 12개의 부와 220개 군으로 바꿨다. 또한 4,300여 개의 면을 2,500여 개로 통폐합하였다. 조선 향촌 사회의 기반이 되었던 성씨 기반 혈연적 권력이 약화되었으며, 이러한 행정 개편은 마을을 단위로 한 전통적인 농촌 주민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22년 「조선호적령」 공포는 근대적 호적 제도를 통해 농촌 마을 구성원들에 대한 강한 통제력을 행사했고, 그들의 일상적인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산업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농업 근대화 역시 추진되었다.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 간척 사업, 비료 투입을 통한 생산성 증대 사업 등이 그 예이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 전농가의 3.1%에 불과한 8만여 호의 지주가 전경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다. 이후 지주들에 의한 토지 집중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소작농과 빈농이 계속 증가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농촌사회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1935년 식산계령(殖産契令)을 발표하여, 금융조합과 더불어 촌락에 대한 경제적 통제를 심화하고자 했다. 1943년 4만 7천 여개의 식산계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농산물 및 생필품 수급을 통해 농민들의 일상을 지배했다. 농촌의 사회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농민들에 의한 사회 운동도 발생하였다. 1927년에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되었고, 1930년대에는 943개의 농민단체가 활동하며 농민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다.

2. 현대 농촌의 변화

해방 이후 한반도는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되고,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사회 변동의 경로를 걷게 된다. 농촌의 재구조화 역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해방 이후 농촌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정책은 농지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한 사회주의적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이후 사회주의 원리에 기반한 농업 정책이 북한의 농촌 모습을 만들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미국의 농업경제학자들에 의해 기획된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기반으로 한 농지개혁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토지 소작제가 해체되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 제도가 자리 잡게 되었다.

1945년 미군정은 일제가 점유하고 있던 귀속농지의 분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전체 농지의 13.4%에 해당하는 귀속농지가 경작자에게 매각되었다. 귀속농지를 제외한 일반농지에 대한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 실시되었다.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 및 공포되었지만, 농지개혁은 지주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결국 농지개혁은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 격변을 겪으며 「농지개혁사업정리에 관한 특별법」 공포와 더불어 1968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되었다. 「농지개혁법」에 의해 분배된 농지는 1945년 말 소작지 면적의 41.8%에 해당하며, 농지를 분배받은 농가는 167만 1370호로 전체 농가의 76.9%였다. 농지개혁은 자본주의적 소농 체계를 만들어냈다. 농촌 계층의 동질화가 이뤄졌으며, 영세 자영농들은 보수층으로 자리 잡으면서 집권 여당의 정치적 지원 세력이 되었다. 농지개혁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 가족농은 현재까지 한국 농촌을 유지하는 주축 농민이다.

1961년 박정희 체제가 출범하고, 본격적인 근대화 기획이 추진되었다. 도시와 공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 변화의 기획에서 농촌은 값싼 노동력과 식량 공급기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농촌은 인구 과소화, 궁핍화, 근대화로부터의 배제 등을 경험했다. 도시의 급속한 발달과 산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은 농촌의 저발전을 심화시켰으며, 농촌의 활력을 떨어뜨렸다.

1970년 시작된 새마을 사업은 농촌 근대화를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농촌 새마을운동은 농촌 생활 환경 개선, 생산 기반 정비, 소득 증대, 주민 조직화 및 의식 개혁 등을 내용으로 했다. 기본적으로 정부에 주도된 하향식 근대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은 도로 및 주택 등 농촌의 외관을 바꾸었다. 예컨대 1971년부터 1981년의 기간 동안 64,686㎞의 농로가 건설되었고, 39,231동의 마을회관이 신축되었으며, 22,468동의 마을 창고가 만들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잘 살아보세’라는 목적하에 소득 향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농민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의 공과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도 평가가 엇갈린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대규모 이농은 농촌 인구를 크게 감소시켰다. 이농 현상은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었고, 197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 그 결과 전통적인 농업지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예컨대 1955년 약 265만 명이었던 전라남도의 인구는 2010년 94만 명으로 감소했다. 농촌의 인구 유출 효과는 장기적이고 누적적이었고, 그 결과는 심각한 고령화와 농촌 공동체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다. 하지만 농촌의 직업 역시 크게 변화했다. 인구 주택 총조사 자료에 따르면, 1960년 농촌 주민의 약 89%가 농업 및 관련 업종에 종사했지만 50년이 흐른 2010년에는 약 32%에 불과했다. 반면 다른 다양한 직업군이 농촌에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촌 주민의 직업 다양화와 이질화가 진행된 것이다. 또한 농민의 경우 농가 소득 가운데 농업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농외 소득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할 때, 농가 소득 가운데 농업 소득의 비율은 30.7%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실 변화는 농촌의 정의와 개념화에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3. 농촌의 과제와 지속 가능성

2020년 한국의 읍이나 면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976만명으로, 전체 대한민국 인구의 약 23%가 농촌에 거주한다. 이는 1944년 1,390만 명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으로 지속적인 이농의 결과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통계상으로 농촌 인구 증가가 관찰되고 있다. 귀촌이 증가하면서 읍이나 면 지역의 인구가 늘어난 것이다. 귀촌은 주민등록상 주소를 시군부에서 읍이나 면 지역으로 옮길 경우 통계로 잡게 된다. 최근 대도시 주변의 농촌 지역에 아파트의 대규모 신축이 일어나고, 이 지역으로 다수의 인구가 유입되고 있다. 이들이 귀촌자로 분류되고, 통계상 농촌 인구의 증가로 기록되는 것이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귀촌인은 47만 7,122명으로 전년보다 3만 2,658명(7.3%) 증가했다. 귀촌인의 연령대별 비율은 30대 이하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48.0%), 50대(16.8%), 40대(16.4%) 등의 순이었다. 귀촌 목적지는 대부분 대도시 인근 지역으로 경기 화성시, 남양주시, 김포시, 광주시 순이었다. 적지 않은 귀촌인들은 도시의 주택 가격 상승 등에 따라 비교적 가격이 낮은 도시 주변의 농촌의 주택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농촌을 읍이나 면 지역으로 규정하는 현재의 통계 집계 방식은 농촌의 현실과 인구 과소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농촌 지역의 인구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면 지역을 따로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전국의 면 지역 인구는 2010년 약 509만 7천 명에서 2020년 약 467만 8천 명으로 감소했다. 1개 면의 평균 인구도 2010년 4,241명에서 2020년 3,958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농촌의 인구 감소는 엄연한 현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인 농촌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최근 읍이나 면 지역으로 규정된 농촌 지역에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발적 귀촌인의 증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 지역의 개발에 따른 이주민의 증가의 결과이다. 농촌 인구의 통계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농가의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계속되는 이농, 혼인률의 감소, 출산력 저하 등은 농가 인구의 감소를 가져왔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980년만 해도 농가 인구는 1,000만 명을 넘었으며, 이는 전체 인구 대비 28.9%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계속 줄어들어 2020년 우리나라 농가 인구수는 약 231만 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4.5%에 불과하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되어 2030년이 되면 농가 인구수는 196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가 인구의 감소와 비농업 인구의 증가는 앞으로 농촌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의 감소만큼 중요한 문제는 농가 인구의 고령화이다. 2020년 전체 농가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 농가의 비율은 42.3%였고, 2030년이 되면 그 비율은 57.2%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인 인구가 늘고 청년 농민층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혼인 건수가 감소하고, 이는 출산율 저하와 농민 후속 세대의 단절로 이어진다. 인구 과소화, 저출산, 고령화 등이 한꺼번에 진행되면서 농촌의 사회적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

앞으로 농가 인구 감소를 줄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농촌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농촌 공간의 환경을 개선하고, 문화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농민의 소득 증진, 생활 서비스의 향상, 농촌 고유의 자연 경관의 장점 부각 등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시민사회 간의 협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증가하는 귀농 및 귀촌인과 원주민 간의 사회적 연대와 신뢰를 쌓는 작업이 중요하다. 또한 농촌의 전통적인 문화와 이주민의 이질적 문화가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정책이 요구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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