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묘(廟) · 사(社) · 능(陵) · 원(園) · 전(殿) · 향교 · 서원 등에서 제사와 관련된 일을 비롯하여 청소, 잡일 등을 맡았던 구실아치를 말한다. 1438년(세종 20) 3월에 고려시대 이래 ‘상소(上所)’라 일컫던 것을 의미가 없는 칭호라 하여 『 주례(周禮)』의 예를 따라 ‘수복(守僕)’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경국대전』 형전에서 태조의 절비(節妃) 신의왕후(神懿王后)와 태조 · 태종의 위패를 봉안한 문수전(文修殿)에 4인의 수복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조선 전기 수복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수복이 머무르는 장소는 수복방(守僕房)이라 하였는데, 종묘에서는 정전의 동문 담장에 잇대어 있다. 1788년(정조 12)경 문신 유의양(柳義養)이 예조에서 관장하는 예제와 예무를 총정리하여 편찬한 『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는 수복방을 ‘소차방(小次房)’이라 칭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수복청(守僕廳)’이라 일컬었다.
현재 수복방은 조선시대 원소(園所) 가운데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소령원(昭寧園)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소령원에는 원소 아래 동북방으로 비각 2동이 있으며, 동쪽 방향으로 중앙에 정자각과 왼쪽에 수복방이 배치되어 있다.
한편, 『 경모궁개건도감의궤(景慕宮改建都監儀軌)』 등의 의궤 자료에서 수복방의 배치 및 규모를 알 수 있다. 또한 『 종묘의궤(宗廟儀軌)』 등에서는 수복 인원의 교체 및 면천(免賤) 등에 관한 내용 등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