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순조 대 왕실 인사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만든 임시 관직이다. 최초의 기록은 1809년(순조 9)에 산실청(産室廳)을 만들 때 전례(前例)에 따라 내의원 관원과 함께 별도로 승후관이 입직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이는 이전에도 승후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산실, 즉 왕비의 출산을 보좌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이었지만 차후에는 국왕과 대비, 왕비, 사친(私親) 등 왕실 인사들의 건강을 살피기도 하였다. 이는 순조 대에 왕실 어른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들의 건강을 살필 전문 인원이 필요하던 상황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승후관은 순조 대에 처음 확인되는 임시 관직으로, 국왕을 포함하여 대비, 왕비, 사친, 세자, 세자비 등 왕실의 핵심 인사들을 진료하는 막중한 업무를 맡은 관직이었으나, 별도로 직능이 명확하게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순조 대 승후관은 주로 산실이나 국왕 사친의 진료를 목적으로 설치하였고, 고종 대에는 국왕의 진료를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승후관은 한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제수되었고 임시직이었기 때문에 겸임으로 업무를 담당하였다. 다만 맡은 업무가 왕실의 건강과 관련된 것이어서 종친이나 외척에서 제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중인 의관인 내의원 관원과 달리 승후관은 사대부에서 차출하여 제수하였다.
1809년 순조 대부터 확인되는 승후관은 왕실 인사의 건강이 악화되면 약방과 별도로 설치되었다. 헌종 대와 철종 대를 거쳐 고종 대까지도 꾸준히 왕실 인사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승후관이 별도로 설치되어 입직하게 하였다.
특히 1890년(고종 27)부터는 승후관이 국왕과 대비전, 중궁전에 자주 설치되면서 정치적 개입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1898년(고종 35)에 의정부 찬정(贊政) 권중현(權重顯)은 국왕인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승후관의 기분이 좋아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진료를 위해 설치하였던 승후관이 고종의 측근이 되어서 정치에도 간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후관은 주로 종친에서 차출하였기 때문에 국왕이 열강들의 각축전 속에서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