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 ()

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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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념
채권 · 채무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신용은 채권·채무 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경제 용어이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이 발달함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구성 요소를 이룬다. 전근대사회에서 신용의 주체로서는 계·보·객주·여각 등이 있었고, 경제행위의 대상으로 전화된 것으로는 어음이 있었다. 오늘날의 신용 제도는 화폐 사용에서 비롯된 상업신용과 금융업자가 행하는 대출거래인 은행신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신용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계'이다. 신용은 생활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된다.

정의
채권 · 채무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개념

신용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을 신뢰 또는 신임한다는 뜻으로 사회생활에 있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경제용어로서의 신용은 이와같은 주관적 · 심리적 의미보다는 객관적인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가리키며, 이때 주관적 · 심리적 요소는 부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즉 경제용어로서의 신용은 단적으로 말해서 채권 · 채무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가리킨다.

상품이나 물품을 매매, 거래함에 있어서 그 대가를 뒷날 지급한다거나 또는 금전을 대차하는 따위의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용은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이 발생하고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히 확대되어 자본주의의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루게 된다.

신용의 종류와 기능

신용을 간단히 말해서 채권 · 채무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인간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채권 · 채무관계에는 일정한 경제행위의 결과로써 생기는 것과 바로 경제행위의 대상으로 전화(轉化)되어 있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이와 같은 신용의 주요한 주체로서는 계(契) · 보(寶) · 객주(客主) · 여각(旅閣) 등이 있었고, 경제행위의 대상으로 전화된 것으로는 어음이 있었다.

경제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신용은 거래로서의 신용이며, 고용계약이나 물품의 매매에 있어 그 값을 뒷날에 지불할 것을 약속하는 지불신용과 금전의 대차거래인 대차적 신용이 있다. 원래 이런 신용은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부터 비롯되어 상업신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신용제도에 있어서 2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상업신용과 은행신용인데, 은행신용이란 금융업자가 행하는 대출거래를 말한다.

이와 같은 신용은 첫째, 유통제비용(流通諸費用)의 주요내용이 되는 화폐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절약하는 기능을 행한다.

이를테면, 거래의 대부분이 신용거래로 되면 신용화폐로서의 지폐가 금속본위제도 아래에 있어서도 금속화폐 대신 유통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채권 · 채무의 상계(相計)에 의하여 결재가 이루어져서 화폐는 필요없게 된다. 또한, 신용을 통해서 통화의 유통속도가 빨라지고 유통에 필요한 통화량은 그만큼 줄어든다. 거기다가 상업신용이 행하여지고 은행신용이 성립되면 구매 또는 지불을 위한 준비금이나 적립금 등 각종의 보장(保藏)화폐형태의 자본이 그만큼 불필요하게 된다.

둘째, 신용은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거래를 성립시키는 동시에, 그 거래를 담당하고 있는 개별기업이 절약된 자본을 생산확대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용의 이러한 사회화과정이 개별 기업적으로 이용되면, 투기가 끼어들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셋째, 신용은 상품유통의 속도에 따라서 자본의 회전을 증진시킴과 아울러 자본의 재생산과정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장기에 걸쳐 분리시킴으로써 여기에 투기가 끼어들 여지가 생기게 된다. 또한, 호황기에는 신용투기가 성행하게 되고 그것이 과잉생산의 한 계기를 이루기도 한다.

넷째,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아래서는 자본의 경쟁이 끊임없이 행하여져 자본이 이동하고 자본이 사회적으로 분배되는 동시에 자본의 일반적 이윤율이 균등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용, 특히 은행신용은 이러한 과정을 매개하고 실현시킨다. 산업자본은 제각기 그 운동중에 생기는 자금을 은행신용을 통하여 서로 사회적으로 융통하면서 생산을 반복하는 것이다.

다섯째, 신용의 발전에 의거하여 주식회사의 형태를 가지는 기업형태가 성립된다. 자본주의적 신용제도 아래에서는 산업자본의 운동중에 생기는 유휴자금이 은행에 집중되어 대부자본이 되고 은행신용을 통하여 자금을 조달한 산업자본가는 이에 대하여 이자를 지불하게 된다.

자본이윤은 이자와 기업이득으로 분할되므로 그 결과 산업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이윤 중 일부를 그 자본 자신이 낳는 이자로, 다른 일부를 자기의 기업활동에 대한 보수로서의 기업이득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뒤에 대부자본가와 기업자본가와의 분리, 대립의 경향을 가져오게 되고, 거기에 이른바 자본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 같은 경향을 가장 단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이 주식회사이다.

한편, 경제행위의 대상으로 전화한 내용은 유통수단의 대용으로서의 신용을 말한다. 이것은 신용화폐로서 화폐적 신용이라고 한다. 전근대적 사회의 이 같은 신용형태로서는 어음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특히 다음과 같은 경우에 발행되어 쓰였다.

첫째, 남에게 채무를 지는 경우 차용증서 대신에 어음표에 지불기한을 명시하여 채권자에게 교부하는 오늘날의 약속어음과 같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둘째, 어떤 상품이나 물품을 매매, 거래함에 있어 그 대가를 뒷날에 지불할 것을 약속하는 어음을 작성하여 교부한 것이니 약속어음 혹은 수표의 의미로 발행된 것이다.

셋째, 어떠한 상점이나 또는 신용있는 사람에게 미리 금전을 맡겨두고 근대의 은행에서와 같이 필요할 때에 수시로 어음표를 작성하여 발행하면 기금을 맡아가지고 있는 상점이나 사람은 곧 지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일람불(一覽拂)어음이나 수표의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넷째,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금전거래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미리 서로 약속을 하고 그 약속된 범위 안에서 어음환표(換票)를 발행하거나, 또는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가는 금전을 이 지방에서 자기가 당겨쓰고 어음표를 작성하여 보내면 저 지방사람이 지불하여주는 방법이다. 이것을 옛날에는 환(換)이라 불렀다.

다섯째, 어음은 옛날에도 양도가 이루어졌으나 다만 기명식과 무기명식을 막론하고 이서(裏書)라는 요식행위의 관습이 없었다. 또한, 어음양도에는 채무자의 승낙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나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이것을 답음(踏音)이라 하였다. 답음의 증거로 어음의 여백이나 이면에 채무자의 수결(手決) 혹은 답인(踏印)을 받아두었다. 또한, 어음기한이 도래하기 전에 돈이 소용되면 어음을 전당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어음을 미리 발행하여 매매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화폐적 신용은 근대사회에 들어와 상업화폐와 은행화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다. 상업신용에 근거하여 발생한 채권 · 채무관계가 유통수단으로 직접 쓰이는 것이 상업화폐인데, 실제로는 상업신용의 증서인 상업어음이 유통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다.

은행화폐에는 태환은행권(兌換銀行券)과 예금화폐가 있다. 태환은행권은 금본위제도 아래서 일정분량의 금화폐를 지불할 것을 약속한 은행의 채무이며, 예금화폐는 은행이 예금자에게 지고 있는 기탁거래상의 채무가 유통수단으로 전화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는 고도의 신용경제사회로서 현금의 필요없이 신용카드에 의하여 모든 거래가 간편하고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전근대의 신용

우리나라 신용의 발달과정을 고찰함에 있어서는 1905년(광무 9)의 재정 · 화폐 · 금융부문에 대한 개혁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전근대적 신용, 그 이후를 근대적 신용으로 구분하여 고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일제의 대장성주세국장(大藏省主稅局長)이었던 메카다(目賀田種太郎)는 재정고문으로 한국에 부임하자 곧 식민지화의 준비공작을 위한 주요경제작업으로서 재정 · 화폐 및 금융부문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에 따라 1905년 9월 『약속어음조례』 및 『어음조합조례』를 발포하여 어음의 형식의무를 규정함과 동시에 어음조합의 조직에 의한 어음보증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재래의 어음제도를 폐지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이에 따라 1906년 1월에 한성어음조합이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그 뒤 평양 · 대구 · 진주 · 전주 · 광주 · 진남포 · 수원 등지에서도 조합의 성립을 보게 되어 재래의 어음표는 과거의 유물로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전근대사회에서 주요한 신용주체로서의 구실을 한 객주는 일제강점기에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고, 계는 오늘날에도 잔존하고 있으나 과거와 같은 성격의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의 신용

우리나라의 시장(市場)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삼한시대부터이다. 이때에 서(黍) · 속(粟) · 맥(麥) · 두(豆) · 도(稻) 등의 오곡이 생산되고 더욱 식상(植桑) · 재면(栽棉) 및 이것들을 원료로 하는 방적(紡績)이 널리 행하여졌고 국내에 있는 많은 시장에서는 철(鐵)을 화폐로 한 매매교환이 성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시장은 사회경제의 발달에 따라 삼한시대의 시장보다 훨씬 발달되었고, 또한 시장에 대한 정책도 행하여지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시장은 신라의 삼경시(三京市) 외에 426개의 주 · 읍 · 시 및 가로시(街路市) 등이 있어서 더욱 활발한 매매교환이 행하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919년(태조 2)에 일반 국도(國都)에 관한 시설과 함께 시장정책을 세워서 먼저 시전(市廛), 즉 상가를 세우고 이를 구획하여 방(坊)이라 하고 상인이 거주하는 지구로 정하였으며, 또한 이(里)를 두어서 일반백성이 거주하는 지구로 정하였다. 지방에는 목(牧) · 부(府) · 군(郡) · 현(縣) · 진(鎭)을 두어 여기에 대관(代官)을 배치하고 대관의 소재지에는 성보(城堡)를 축조하여 외적에 대한 방어 및 피난의 장소로 함과 동시에 정치 · 경제의 중심지로 삼았다.

고려조에 있어서의 이러한 행정구획은 513개였으므로 당시의 성읍시장(城邑市場)은 적어도 500개 이상이 되었을 것이며, 이밖에 교통의 요지, 화물의 집산지 등에 촌락시(村落市)가 있었고 이러한 향시(鄕市)를 떠도는 행상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시장에서 매매교환의 도구로 사용된 화폐는 시대에 따라 다르나 혹은 철전(鐵錢) · 전곡(錢穀) · 은기폐(銀器幣) · 면폐(棉幣) · 견폐(絹幣) · 저화(楮貨) · 추포폐(麤布幣) 등이었다.

시장의 성립으로 신용에 의한 매매거래가 일찍부터 이루어졌으며 시장의 발달과 함께 더욱 성행,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신용대출에 관한 조직적인 기구로 보(寶)를 들 수 있다. 『고려사절요』에서 “보는 전곡을 시납(施納)하여 본(本)은 그대로 두고 이식(利息)을 취하여 영구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므로 보라고 한다.”고 하였다.

보의 본래적 기능은 이자로써 구빈(求貧)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공적 경비에 충당하는 것인데 963년(광종 14)에 제위보(濟危寶)가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문종 때에 팔관보(八關寶)가 설치되었다. 모두 국가기관으로 관리를 두고 관리시켰으며 보에 시납된 미곡을 민간에 신용으로 대출하고 그 이식으로 각종 구제나 경비에 충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보의 본래 기능은 차츰 변질되어 각 궁원고(宮院庫) · 상평창(常平倉) · 의창(義倉) · 주창(州倉) 등과 함께 실제에 있어서는 공사(公私)의 고리대기관으로 전락하였다.

조선시대의 신용

조선시대의 신용을 고찰할 때 먼저 일반사회에 깊이 침투, 보급되어 있었던 계를 생각할 수 있다. 계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제도라고 하는데 원래 사교 및 종교적 회합에서 비롯된 것이 차츰 시대의 요구와 사회의 사정에 따라 그 내용에 신축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계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단결하여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일정한 규약을 설정하고 서로 화폐 또는 현물을 갹출하여 여러 가지 사업을 행하는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인보공조(隣保共助)의 이념과 ‘믿음’의 세계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목적을 가진 하나의 조합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계는 고려 말기 호포(戶布)의 부담에 응하기 위하여 서민이 조직한 것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말기까지 군포계(軍布契)라는 납세단체로서 지속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생산력이 약한 상공업자들이 관부에 납입할 진상품이나 공물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종의 계를 조직하고 그것이 뒤에는 동업자의 조합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공물계(貢物契)가 다수 조직되었음이 비변사 편찬의 『공폐(貢幣)』나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에 나타나 있다. 납세 공물을 위한 자치단체로서 발달하여온 계가 보험의 성질을 갖추게 됨에 따라 공공사업의 경영, 식산흥업, 상호부조 혹은 저축금융 등의 목적에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각종의 계가 성행한 것은 관치행정(官治行政)의 불비를 보완하기 위한 백성들의 자치적 활동의 결과일 것이며 국민의 경제력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특히 상호부조와 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더욱 유교사상이 보급되었던 조선사회에서는 신의와 약속의 관념이 일반화되어 이것이 계의 발달을 조장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의 종류는 그 목적에 따라 다양하나 여기에서는 경제문제와 신용과 관련된 관점에서 다음 몇 가지만을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상호부조와 재해보험의 목적을 가진 계로서 사회규범상 중요시하였던 관혼상제에 관한 계가 가관계(加冠契) · 호신계(互信契) · 향사계(香祀契) 등 그 수도 가장 많고 일종의 상호보험 또는 공제조합의 성질을 띤 것이었다.

둘째, 산업적 목적에서 조직된 것으로 오늘날의 생산조합 · 구매소비조합과 비슷한 것이었다. 예컨대 촌락주민의 노전을 공동수익의 목적으로 공동 경영하는 일종의 촌락공유체인 노전계(蘆田契), 공유산(共有山)의 양송(養松) 목적인 송계(松契), 목공의 상호친목과 작업부담의 목적인 대목계(大木契), 농민의 상호친목과 제초(除草) 및 기타 작업부담인 두레계와 사계(社契) · 우계(牛契) · 어망계(漁網契) 등이 그것이다.

셋째, 자금융통의 목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오늘날의 공제조합 · 신용조합과 비슷한 것이 있다. 예컨대 계원의 출연금으로 대부(貸付) · 이식(移殖)을 행하는 월수계(月收契), 상인간의 친목과 자금융통이 목적인 상무계(商務契), 자금융통의 산통계(算筒契), 계원의 출연금을 대부하는 증식목적인 창신계(昌信契)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계는 대체로 30인 전후의 계원으로 조직되나 큰 것은 수백 인의 경우도 있다. 계전(契錢)의 이용방법은 계원에 한하는 경우와 계원 외에도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계전의 융자는 대인신용(對人信用)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상당한 고리인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계는 조선시대에 전국 모든 지역에 널리 보급되고 일반서민의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의 각 방면에 걸쳐 극히 유용한 구실을 하였다. 더러 문제점과 결함이 지적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신용사회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조선시대의 시장상인에는 경(京)에 시전인, 지방에는 보부상 · 여각 · 객주 · 주막 등이 있었다. 길이 험악하고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행상이 발달하게 마련인데, 특히 토적(土賊)이 들끓고 통치질서의 문란으로 인한 가렴주구로 말미암아 보부상인들은 자구책으로 강력한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행상조합인 보부상회(褓負商會)로서 전국적으로 공고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엄격한 불문율을 가지고 이 규율에 위반하여 부정불의를 행하고 허위거래를 하는 사람에게는 만좌중에서 혹독한 제재를 가하였으며, 또한 상하의 예의가 바르고 동료간의 약속을 엄히 지켰으며 상호부조의 기풍이 강하여 신의와 신용을 본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보부상의 중심세력을 이룬 것은 개성의 상인이었다. 고려가 멸망하자 전조의 신하들은 조선조에의 출사를 꺼려 생계의 수단으로 당시 천업시하던 상업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팔도에 흩어져 행상을 하게 되고 뒤에 개성상인의 명성을 얻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개성상인은 검소 근면하며 상기(商機)를 잡는 데 예민하고 단결력이 강하며 놀라울 정도로 신용제도가 발달되어 있었다.

더욱 금융에 있어서는 중국의 산서표장(山西票莊)에도 뒤지지 않는 활동을 하고 있어 시변(時邊)이라는 독특한 매출방법을 행하였는데 그 대출고(貸出高)는 은행이나 금융조합을 능가하였고, 또한 그들이 창출한 차인제도(差人制度) · 사개부기(四介簿記) · 어험(魚驗) 등은 유명하다.

개성상인의 보부상으로서 활동하는 행상인은 전국을 순회하여, 그 수는 2,000∼3,000인에서 많을 때는 1만인 이상이 되었다. 그들은 상당한 자본을 가지고 화물을 보에 싸고 또는 말등에 얹어 운반하였다. 이 중에는 자기의 계산으로 독립 영업하는 자와 차인(差人)이라 하여 주인으로부터 신용으로 상품 또는 자본을 공급받아 상품을 판매하고 나아가서 금융을 하는 자도 있었다. 또한, 보부상은 현금거래뿐만 아니라 신용거래도 하고 고리대금도 하였다.

지방행상을 활발히 한 개성상인은 일찍이 시장금융의 유리한 것에 착안하여 전국도처에 출입하면서 금융상의 활동을 하였다. 돈을 빌리는 사람은 주로 시장에 출입하는 소상인이었으나 그 중에는 지방의 농가도 있었다. 시장대출은 무담보의 신용대출이었으며 따라서 금리는 고율이었다. 시장금융의 방법이나 명칭도 지방에 따라 구구하여 일변(日邊) · 월변 · 연변 · 시전(市錢) · 체계(替計) 등 여러가지였으나 대체로 장날에서 다음 장날까지를 1기간으로 이율을 정하였다.

상업이 발달한 개성은 또한 사개부기도 저명하여 그 양식은 서양부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색을 지녔고, 기장의 방법은 당시의 경제사회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부기의 발명은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을 뿐 정확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서양부기의 발명보다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이라고도 칭하며, 부기의 조직이 봉차(捧次:자산)를 1개(介), 급차(給次:부채)를 1개, 이익을 1개, 손실을 1개, 합쳐서 4개가 되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사개부기에 속하는 장부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일부를 표시하면 외상판매를 기입하는 것을 외상장책(外上長冊), 외상매입을 기입하는 것을 타급장책(他給長冊)이라 하였고 혹은 상책(上冊) · 하책이라 하여 상책에는 현금판매를 적고, 하책에는 외상판매를 기입하였다.

각종의 장부를 정리하여보면 대체로 주요부와 보조부로 나누어진다. 주요부에는 일기장(日記帳) · 분개장(分介帳) · 봉차장(자산장) · 급차장(부채장) · 원장(元帳) · 외상장책 · 타급장책 · 결산장 등이 있다. 보조부에는 현금출납장 · 물품거래장 · 위탁물처리장 · 어험수지장(魚驗收支帳) · 회계책 · 손익계산장 등이 있다. 이와같은 부기의 발달, 장부의 정리상황은 상품에 대한 신용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신용제도가 상당한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음을 증명하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장부에 기입하는 특용문자(特用文字)나 부호 등에서도 알 수 있다. 가령 상(上)과 하(下)의 두자는 현금출납에 한하여 사용한 것으로, 현금이 나갔을 때에는 그 행(行)의 말단에 ‘하’자를 기입하고 현금이 들어왔을 때에는 ‘상’자를 기입한다. 직전(直錢), 즉 현금으로 판 것을 ‘직방(直放)’이라 기입하고 현금으로 사들인 것을 ‘매득(買得)’이라 기입한다. △는 타급장부나 외상장부 중 수지의 관계가 소멸되었을 때에 사용한다는 등이다.

어쨌든 전성기를 맞이한 조선시대의 보부상이 놀라울 정도의 단결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상행위와 금융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양반의 후예를 중심으로 한 개성상인이 그 중심세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경시(京市)에 있어서의 육의전(六矣廛)은 유럽의 중세 도시에서 널리 행하여진 상인조합이나 동업조합에, 그리고 향시에 있어서의 보부상은 중세 혹은 그 이전의 대상(隊商) 또는 상인조합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객주 및 여각은 모든 국가에 있어 인정되고 있는 보편적 상사제도(商事制度)의 하나로 가령 중국의 행기(行紀), 일본의 돈야(問屋), 영국과 미국의 팩터(factor), 독일의 코미쇼네르(Kommissiona"r)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업무의 내용을 보면 다른 나라의 제도는 다만 위탁매매의 업무에 한정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위탁매매 외에 금융 · 숙박 · 도매(都賣) · 중개 · 운송 · 기탁 등 실로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업무에 종사하고 있어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객주와 여각과의 구분에 관해서는 대체로 객주가 취급하는 화물의 품목에 별다른 제한이 없으나 여각은 주로 해산물이나 곡물 등 용적 중량이 커서 취급하기가 곤란한 화물에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객주는 화물을 수용할 특별한 설비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으나, 여각에는 이러한 설비로서 대개 창고가 있고 점포도 넓으며 마방(馬房)을 설치하여 화물을 운반하여온 우마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객주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항해술이 발달하고 대외무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① 물산객주(物産客主) : 객주의 원형이며 위탁매매가 주요업무이다. 객주가 행하는 화물의 매매는 보통 거간(居間)이라는 중개인을 두고 하게 된다.

또한, 부수적 업무로서 타지에서 온 위탁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여주고 또는 하주(荷主)나 매주(買主)를 위하여 대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 대부금에는 물품의 판매위탁자에 대한 가급금(假給金), 물품의 위탁판매를 조건으로 그 물품의 수집을 위한 선급금(先給金), 물품의 매수를 위한 선대금(先貸金)이 있고 때로는 예금업무를 겸하기도 하였다.

그 예금에는 하주가 위탁한 물품을 매각하고 그 돈을 객주에게 이자를 붙여 예금하는 경우, 외획제도(外劃制度)에 의한 국고의 일시예금 등이 있다. 또한, 어음의 발행 · 할인 · 인수 등의 업무도 하였으며 오늘날의 은행과 같은 금융업무도 담당하였다.

객주는 단지 영업상의 사항에 한하지 않고 위탁자의 신상문제까지 뒤를 돌보아주었으며 양자 사이의 신뢰관계는 한 대(代)에 그치지 않고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객주와 위탁자의 업무 내지 신뢰관계는 물산객주 이외의 유형의 객주에 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변함이 없다. 다만 유형에 따라 객주의 업무내용 및 범위가 달라진다.

② 여각 : 주로 한강연안의 각 포에서 곡물 · 소금 · 어류, 기타의 해산물을 다루었으며 큰 창고와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널리 상거래를 하는 대상인이었다.

③ 보상객주(褓商客主) : 보상을 상대로 하는 객주이며 취급품목은 금 · 은 · 동 · 포 · 면 · 능(綾) · 지물 · 인삼 · 피혁 · 잡화 등으로 부상(負商)이 다루는 품목과 혼동되지 않도록 법령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부상은 부피가 크고 무거우며 비교적 싼 물품, 예를 들면 생선 · 소금 · 수철(水鐵) · 토기 · 목물(木物) 등을 지게에 지고 행상하는 것으로 보상과 부상이 다루는 상품의 차이는 마치 객주와 여각의 차이와 비슷하였으므로 보상은 객주와, 부상은 여각과 친교를 가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보상이 다루는 품목 중에는 각 지방의 특산물이 많았으므로 특정의 상품에 대한 전문화로 그 유대는 3, 4대에 걸쳐 계속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예를 들면 충청도 서천 · 한산의 저포(苧布), 전라도 구례 · 곡성의 마포(麻布), 나주 · 남평(南平)의 목면(木綿) 등과 같이 각 지방의 특산물과 거래관계가 있는 보상과 객주는 깊은 신뢰를 가지고 굳게 맺어지게 되고 이것이 바로 보상객주의 유래이며 객주 중에서도 가장 신탁적(信託的)이고 독점적인 기능을 가진 전형적인 객주라고 할 수 있다.

④ 무시객주(無時客主) : 언제든지 사용하는 가정일용품을 다루는 객주를 뜻한다. 또한, 주로 부상의 물품을 다룬다는 점에서 부상객주라고도 할 수 있다.

⑤ 만상객주(灣商客主) : 청선객주(淸船客主)라고도 하며 중국상인을 상대로 하는 객주를 말한다. 만상이란 의주만(義州灣)의 상인이라는 뜻으로 한국의 서북단에 위치하는 의주만은 중국과의 상거래가 행하여지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국내에 유통하는 많은 중국상품은 주로 만상객주의 손을 거쳐 수입된 것이다. 명청조(明淸朝)가 들어서자 중국과의 교통이 크게 열려 한국의 여러 항구에도 중국의 선박이 출입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중국 선박과의 거래를 담당한 객주를 청선객주라 하고 이들에 대해서만 특허를 주고 소정의 구문세(口文稅)를 국가에 납입하도록 하였다.

⑥ 환전객주(換錢客主) :금융업을 전문으로 하는 객주로서 대금업자 내지 금융기관에 해당하는 것이다.

⑦ 보행객주(步行客主) : 숙박업이 본업인 객주이다. 일반의 객주는 위탁자인 하주에 대해서만 숙식을 제공하나 보행객주는 그러한 제한이 없다. 숙박업소로서 보행객주 외에 주막이 있으며 이것은 중류 이하의 객을 상대로 한다.

⑧ 경주인(京主人) : 지방의 관리를 위하여 중앙과 지방과의 연락 · 여숙(旅宿) 및 기타 여러가지 중개를 하는 여각주인, 즉 광의의 객주이다. 경주인은 위탁자가 관리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향리(鄕吏), 즉 지방의 관리이며 또한 그 업무는 위탁자를 위해서 행하는 사적 업무는 물론, 국가를 위해서 납세의 대행 등 공적 업무까지를 중개하는 광범한 일에 종사하였다.

⑨ 원(院) : 행상들의 숙박소이다. 문헌에 따르면 국가의 기관으로서 역과 원을 두고 역을 군사상 · 정치상의 명령전달의 사명을 담당시키고, 원은 산업상 · 교역상의 편의제공의 사명을 수행시키기 위한 상려(商旅), 즉 행상인을 숙박시킨 것이다. 원의 업무가 보행객주 및 일반의 객주와 상통하면서도 그것이 공적인 기관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객주는 어음의 발행 · 할인 · 인수 등을 한다고 위에서 기술하였거니와, 어음은 우리의 화폐경제사회의 신용제도사상 가장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우리의 미덕인 신용을 권장하는 가장 간편한 표권(票券)이었다. 어음은 닥[楮]을 원료로 한 간지(簡紙) · 장간(壯簡) · 창호지 · 백지 등을 임의로 사용하되 대략 길이 4치5푼에 너비 1치5푼 가량으로 자른 종이쪽에 지불할 금액을 한복판에 쓰고 도장을 찍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이 저지(楮紙) 사용법의 제도는 저화(楮貨) 또는 저폐(楮幣)에서 기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저폐 사용은 고려말 공양왕 때이며 조선 태종 때에 이르러 널리 쓰여져 현종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저폐는 송나라의 교자(交子)와 회자(會子), 그리고 금 · 원나라 이후의 교초보(交鈔寶)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말에 중국의 이 초저폐(鈔楮幣)가 수입, 통용된 바 있어 이 초법(鈔法)에서 저폐법이 나오게 된 것이 분명하다.

원래 송나라의 교자는 촉(蜀)의 철전(鐵錢)이 무거워서 무역통상에 불편하므로 이 교법(交法)을 행하여 일교(一交)로 한 꿰미에 해당시키는 이른바 일민당용(一緡當用)으로 사용하였고 이것이 뒤에 초로 변하여 고려에 들어와 유용된 일이 있어 결국 저화의 발생을 보았던 것이다. 이 종이쪽에다가 금전의 신수(信數)를 두어 통용하는 저화가 조선 태종 때에 성행하였으니 어음법은 그 뒤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정신은 초의 제도에서와 같이 무역통상에 중전(重錢) 운반이 불편하므로 그 편의를 도모하고자 나온 것이며 이것을 처음 발행하기 시작한 곳은 서울의 육의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어음은 주인, 즉 평양주인이니 원산주인이니 하는 곳과 물산객주에게서 사용되다가 마침내는 나라의 호조와 일반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된 것이다.

어음표 대조를 살펴보면 어음표의 중간을 둘로 쪼개어 오른쪽은 남표(男票) 또는 웅편(雄片) · 웅표(雄票)라 하여 받는 편에서 가지고, 왼쪽은 여표(女票) 또는 자편(雌片) · 자표(雌票)라 하여 주는 편이 가진다. 사기표(砂器票)도 마찬가지로 사기접시나 기왓장 같은 것을 둘로 쪼개어 나누어 가지고 기한이 되어 양쪽을 맞추어보아 꼭 맞으면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박하고 간편한 어음이 수백년간을 통하여 별착오 없이 널리 사용되어온 것은 우리의 경제윤리와 도덕생활의 일면을 여실히 말하여주는 미풍양속이라 하겠다.

한말 이후의 신용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메카다는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취임하자 곧 재정 · 화폐부문과 금융부문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고 식민지경제정책의 중심기관인 중앙은행을 설립하였다. 그는 이어서 부동산금융기관과 급격히 몰락하여가는 농민층에 대한 특수금융기관을 설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동화(白銅貨) 회수로 인하여 우리나라 상인들 사이에 금융공황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1905년 9월 『약속어음조례』 및 『어음조합조례』를 발포하였다. 이로써 어음의 형식의무를 규정함과 동시에 어음조합의 조직에 의한 어음보증을 시행하게 하여 전통적인 재래의 어음제도를 폐지시켰다.

또한, 1905년 9월 『공동창고장정(共同倉庫章程)』을 발포하여 15만원(圓)의 대출자금으로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漢城共同倉庫株式會社)를 설립하게 하여 화물의 기탁을 인수하고 이에 대한 보관증권을 발행하고 주로 상품담보대출을 하는 한편 상업어음의 할인 및 부동산담보대출도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06년 3월 『은행조례』를 공포하여 모든 증권할인업무 · 환업무 및 예금대출업무를 하고 있는 업체를 전부 은행으로 간주하여 모두 인가제로 규제하는 등 우리나라 은행에 대한 탁지부(度支部)의 감독권을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농공은행조례(農工銀行條例)』를 발포하여 외획제도(外劃制度)에 대신하는 새로운 지방금융기관을 전국 11개소에 설치하고 부동산금융 및 장기금융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지방금융조합규칙을 제정하여 각지에 지방금융조합을 설립함으로써 지방 소도시의 상공업과 농촌에 대한 일제의 경제적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정비, 강화되었으며, 이와같은 일련의 제도적 장치 및 그 강화에 의해서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신용제도는 금지 또는 위축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가령 객주는 1930년대까지 존속되었다고는 하나 그 실체에 있어서는 과거와 같은 면모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광복 후의 신용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독자적으로 경제를 운용할 수 있게 되어 1950년 5월 13일 『한국은행법시행령』이 제정, 공포되고 1950년 6월 6일 금융행정의 최고기관으로서 금융통화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의 결정으로 한국은행정관이 작성되어 전액 정부출자에 의한 자본금출자가 행하여져 1950년 6월 12일부터 우리나라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이 그 업무를 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발족한 지 꼭 2주일 되는 날 6·25동란이 발발하여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962년 이래로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여 1960년대 및 1970년대에 고도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룩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사회 · 경제 · 문화의 모든 면에서 근대화가 강력하게 추진되어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대립, 충돌하기도 하였고, 나아가서는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 · 불신풍조 등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미풍양속의 전통적인 것을 되찾고 신의와 신뢰에 바탕을 둔 경제윤리, 도덕적 생활확립의 소리가 높아졌으며, 이와 아울러 신용의 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즉, 신용카드에 의한 매매거래 기타 업무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신용카드업은 은행제카드로 국책은행이 부수업무로 하고 있는 국민비자카드 · 은행신용카드(BC) · 판매점카드 등 3종과 외국계카드로 아멕스(AMEX) · 다이너스클럽카드 등 2종, 전문회사카드로 코리언익스프레스 · 세종카드 등 2종이 있고, 판매점카드로는 신세계 · 미도파 · 롯데 등 주요백화점카드 등이 발행되었으며, 가입회원은 약 240만명에 이르렀다.

더욱이 정부는 1987년 『신용카드업법』을 새로 만들어 신용카드업의 건전한 육성과 소비자금융의 활성화를 뒷받침해주었다. 신용카드회사의 업무영역을 대폭 확대하고 법제화시켜 카드회원에 대한 지급보증 및 자금의 융통, 여행알선, 보험대리, 물품 및 용역의 할부 또는 외상구매를 위한 지급보증업무 등을 하도록 함으로써 회원들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신용생활의 편의가 극대화되었다.

오늘날 많은 국민들이 2, 3개의 신용카드를 이용하고 있을 정도로 신용생활이 일반화되고 있다. 국내외에 있어서의 이 같은 신용카드의 활용은 대금결재수단의 간편화와 생활의 편리화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사치, 낭비를 유혹하고 더욱 가맹점과 짠 전문카드 위조단이 빼낸 고객정보로 카드를 위조해 물건을 사거나 현금서비스를 받는 사례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가령 비씨카드는 최근 위조카드가 일본 국철(JR)승차권 구매에 이용된 것이 확인되고 물품구입 액수가 지나치게 많았던 카드 4,200여장에 대해 일단 사용정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한 은행계의 카드사는 1997년 6월 태국에서 100여건 약 6만 달러 규모의 현금인출이 위조카드에 의한 것임을 적발하고 회원들을 상대로 일일이 카드 분실, 또는 비밀번호 유출 여부를 조사한 바 있다.

신용생활의 선진화와 일반화는 이것을 악용하여 신용유통의 질서를 교란하고, 한편 사치 향락의 풍조를 조장하는 일면을 간과할 수 없다. 신용카드 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회원 각자의 주의, 그리고 절제있는 신용생활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하겠다.

생활과 신용

신용은 생활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된다. 이와같은 신용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여주고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해준 것이 계였다. 계는 거의 모든 마을에 동계(洞契) · 이중계(里中契)가 조직되고 그밖에 각양각색의 계가 조직되어 그 목적에 따라 영위한다. 따라서 계를 무시하고서는 한국인의 생활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성행한 계는 조선 정교(政敎)의 기본인 유교를 신조로 하고, 목민(牧民)의 방편으로 삼았던 향약을 기초로 하여 발전된 것이다. 향약은 송나라 여남전(呂藍田)의 향약 4대강령에 기원하여 100년 뒤 주희(朱熹)의 보정(補訂)을 거쳐 한국에 계승된 것으로 이황(李滉) · 이이(李珥)와 같은 거유에 의해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수정하여 지방에 행하게 된 것이다.

향약은 유교적 덕육(德育)을 이념으로 하고 환난상휼(患難相恤)하는 공제적 기능을 주목적으로 한 것이다. 고을 또는 마을을 단위로 향약을 조직하고 혼상(婚喪)에 상호부조하며 공동출곡(共同出穀)한 사창(社倉)의 곡식을 가난한 사람에게 대여하고 수확 뒤 원본이식(元本利息)을 취한 것이다. 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러한 정신은 향약에 의하여 유교적 상호구제로 심화되고 사창에 의해 공동저축으로 구제방법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유교적 도덕관에 바탕을 둔 신용의 생활화는 어음의 사용으로 구체화되었다. 우선 호조의 어음 사용례를 보면 어느 고을의 세전(稅錢)이 감영(監營)을 거쳐 호조로 상납된다면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라 어음이 사용된다. 가령 고을에서 곡식 1만석의 조세를 받아 감영에 상납할 때 이 곡식을 상인에게 입찰식으로 팔아 그 작전(作錢: 대금)을 상납할 터인데, 이때 현금수송에 위험이나 불편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개성부(開城府)에서 경기감영으로 작전을 보낸다면, 상인이 한성 육의전 가운데 입전에 가서 어음을 발행하여 개성부에 주면 개성부에서는 그 어음을 경기감영에 상납하고 경기감영에서는 지정된 육의전에 가서 현금으로 찾아오거나 또는 육의전 어음표를 받아 호조에 상납한다.

호조에서 경비가 소용되면 호조판서는 호조집리(戶曹執吏:지금의 회계담당자)로 하여금 호조역리를 대동하여 어음표를 육의전에 내주고 사기어음쪽을 발행한 것이 있으면 동시에 내어주어 서로 부합되면 현금을 찾아다가 사용한다.

또한 환간(換簡)도 사용되었는데, 서간식(書簡式)으로 하는 것과 어음표를 첨부하여 행하는 서너 가지의 방식이 있었으며, 금전의 지불을 편지로 위탁하는 제도이다. 그 사용례를 보면 평양사람이 서울에 와서 받은 10만냥을 휴대하고 가는 불편을 피하기 위하여 이것을 서울 객주에게 기탁하고 평양의 객주 앞으로 된 환간을 받아 가지고 평양객주로부터 현금을 찾는 것이다.

또는 한성의 육의전 중 백목전인(白木廛人) 갑(甲)이 인천의 포목상인 을(乙)로부터 받을 돈이 5만냥이 있고 동시에 병(丙)에게 지불하여야 할 부채가 있다면 갑은 을을 지불인으로 하는 환간을 작성하여 병에게 교부하고 병은 을로부터 현금을 찾아 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음의 양도도 하고 전당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음이나 환간이 수백년 동안 공사간에 대차 · 매매, 기타 복잡한 거래에 여러 가지 형태로 주고받고 하였던 것이다. 어음 · 환간의 본존(本尊)인 한성의 육의전의 경우 어음의 결재청산의 양이 대단히 많아서 그리 손쉽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즉 육의전은 수도의 상업경제권과 국가의 재정지배권을 간접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또한 상품전매권을 획득하고 있어서 어음환간의 수수관계가 전국적으로 걸쳐 있어 매우 복잡하였던 것이다.

육의전의 각 전은 적어도 50∼60방(房) 이상의 도원(都員)들이 장사를 하고 있어 그 많은 여러 방에서 각기 거래, 수수되는 어음은 실로 엄청나게 많았다. 따라서 한 곳에서 그것을 교환, 결재하는 어음교환소를 두었고 그것을 역인청(力人廳)이라 불렀다.

이에 덧붙여 어음매매가 행하여졌으니 이것은 부자나 대금업자가 어음의 예매(預賣)를 행하는 것이다. 가령 대금업자가 10만냥을 가지고 취리(取利)하려고 한다면, 그 돈을 뜻하는 액수대로 나누어 어음을 발행한 뒤 전거간(廛居間)을 시켜 육의전에 가서 어음을 팔게 한다. 자금이 필요한 전인(廛人)은 그 어음을 사게 되나 5일간을 한 파수로 한 어음이면 한 파수의 이자인 변돈만 지불하고 산다. 그 이자 중 거간이 십일제(十一制), 곧 10분의 1의 구전을 받고 그 한 파수가 지나면 또 이자를 지불한다.

그 전인이 현금이 필요하다면 그 전거간을 통하여 샀던 어음을 발행한 대금업자에게 가서 현금지불을 청구하면 된다. 어음을 그대로 사용하든지 현금을 찾아다가 사용하든지간에 이 경우 전인은 자기의 어음을 대금업자에게 발행하여 줌은 물론이다. 이 어음매매에는 반드시 전거간이 왕래하는 것으로 종로 전거간만 수십인이 있었고, 그밖에 문안과 문밖의 전거간은 합하여 수백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어음은 전근대의 화폐경제시대의 부산물로서 화폐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함에 있어 그 결함과 불편, 불합리한 것을 잘 조화하고 보조하여준 특수하고 진기하며 간단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신용제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하차은 종이쪽지나 사금파리가 수백년 동안 아무 탈이나 이상 없이 통용되면서 신용을 지켜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지극히 순박하고 신의를 존중하는 우리사회의 미풍양속을 나타내는 것이고 상관습(商慣習)의 측면에서 보면 절조(節操) 있는 상윤리(商倫理)의 진화와 경제도덕의 발달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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