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입·코·눈 등이 있는 앞쪽의 머리이다. 몸의 표면에서 형태의 변화가 가장 많은 부분으로 각 개인을 인식하는 표지이다. 얼굴은 개인의 마음상태, 나아가 한 민족의 심성을 반영한다. 특히 눈을 통해서는 그 사람의 됨됨이까지 알아차릴 수 있다. 한국인의 얼굴은 추운 지방에 오랫동안 살았던 것을 반영하여 넓고 평평하며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코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한국인의 종교적 이상이나 삶의 애환을 담아 종교화나 불상, 탈 같은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에 표현되어 왔으며, 얼굴을 통해 운명을 점치는 관상법이나 길흉을 말한 속담도 있다.
얼굴은 머리의 앞부분으로 몸의 표면에서 형태의 변화가 가장 많은 부분이다. 얼굴은 4종 7개의 구멍과 얼굴뼈, 그리고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한 쌍의 눈과 콧구멍과 귀에 입을 더해 구멍이 7개이다. 코는 속코와 겉코로 나눠지고 겉코의 밑에 한쌍의 콧구멍이 자리한다. 입은 윗입술과 아랫입술로 나뉘고 그 좌우에 볼이 있다. 볼과 윗입술 경계선 좌우로 팔(八)자 모양의 코 · 입술 · 주름[鼻唇溝]이 있고 아랫입술과 턱 사이에는 턱 · 입술 · 주름[頣唇溝]이 가로질러 있다. 귀는 머리 · 얼굴 · 목의 세 부분이 서로 합쳐지는 곳에 자리하고 귓구멍이 있다. 또 얼굴에 생겨서 일생 계속되는 털에는 눈썹과 수염이 있다.
얼굴의 지주(支柱)가 되는 뼈가 얼굴뼈인데, 코뼈[鼻骨] · 광대뼈[頰骨] · 윗턱뼈[上顎骨] · 아랫턱뼈[下顎骨]로 이루어진다. 얼굴의 근육은 저작근(咀嚼筋)과 안면근(顔面筋)으로 나뉘는데, 앞의 것은 아랫턱뼈에 붙어 있으면서 저작운동을 맡고, 뒤의 것은 눈 · 코 · 귀 · 입의 주위에 붙어 있는 수많은 작은 근육들로 눈과 입을 여닫거나 코와 귓바퀴를 움직여 준다. 사람의 안면근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운동하여 여러 가지 표정을 나타내므로 표정근(表情筋)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표정은 얼굴 각 부위의 단순한 변화가 아니고 정의(情意)의 지속적인 또는 순간적인 변화가 이들 기관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표정과 마음상태의 긴밀한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얼굴을 구성하는 여러 부위는 개인의 마음상태, 나아가 한 민족의 심성을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서러운 눈을 가진 이가 있는가 하면 늘 웃는듯한 표정을 가진 사람이 있고 고집스러운 입모양을 짓는 이도 있다. 민족에 따라서도 그것이 다른데, 오랜 전쟁에 시달린 민족의 얼굴은 지친 모습에 표정이 거의 없는듯하고 역사의 역경을 이겨온 민족의 얼굴은 슬기롭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반면 좋은 자연환경에 역사의 풍파를 별로 겪지 않은 민족은 대체로 밝고 명랑한 얼굴표정을 짓는다.
얼굴 가운데 눈은 특별한 부분이어서 마음 상태를 잘 드러낸다. 눈은 보이는 현상만을 인식하지 않고 그 내면의 것까지 느끼는 기관이다. 이처럼 사물을 깊이있게 분별한다 해서 심안(心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는 눈을 통하여 그의 사람의 됨됨이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 눈은 곧 얼굴의 창(窓), 마음의 창과도 같은 것이다. 한편, 얼굴은 개인의 생활 및 자연환경, 사회적 배경, 생리적 환경 등에 따라 변하고 구분된다. 그래서 백인의 얼굴은 길고 중간의 크기를 가지며 눈이 움푹 들어가 있고 한국 · 일본 · 몽고 사람의 얼굴은 대개 넓고 짧으며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코가 낮은 편이다.
그러면 한국인의 얼굴은 어떤 특징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고 이웃 민족의 얼굴과 어떻게 다르고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인식, 표현되었고 오늘에 이르는 그 변화과정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인의 얼굴 특징을 체질인류학(體質人類學)에서 다룰 때, 머리뼈 높이 · 얼굴뼈 · 코 · 눈 · 눈코주름 · 속쌍꺼풀 · 머리카락 · 털 · 광대뼈가 주요대상이 된다. 그 가운데 눈코주름 · 속쌍꺼풀 및 광대뼈의 발달은 한국인의 조상이 북쪽 추운지방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을 나타내준다고 풀이할 수 있다. 키는 중키이며, 얼굴이 옆으로 퍼진 점과 더불어 속쌍꺼풀이 생기고 광대뼈가 높아진 것은 눈동자와 콧속을 따뜻하게 보온하고 몸의 열량을 보존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일본인 몇 명이 한국인의 체질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그 대상은 남한에서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이주하여 10∼40년간 살아온 한국인들이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인의 체질 가운데 몸등걸부위[軀幹部]와 사지(四肢)는 일본인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변하지만, 머리 · 얼굴부위[頭顔部] 계측치는 출신지의 한국인과 같았다. 이것은 몸등걸과 팔다리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반면, 머리 · 얼굴부위의 체질은 유전자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얼굴의 계측학적 연구는 체질인류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한국인의 체질에 관한 외국인의 연구는 이미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바엘츠(Baeltz)는 1833 · 1901 · 1907년에 동아시아 사람들을 아이누, 만주-한국, 몽고 또는 말레이-몽고형으로 나누었다. 그는 만주-한국형이 만주 · 한국 · 북중국, 일본에서는 상류층에 분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짧은 머리에 좁고 긴 얼굴, 광대뼈가 덜 튀어나왔고 눈두덩의 발달이 낮으며 몽고형보다 키가 훤칠한 것을 그 특징적 체형으로 하였다. 1913년과 1917년에 규호(久保)는 경기도 태생의 한국인 남녀를 대상으로 체질을 조사하였다. 1923년과 1925년에 시로코고로프(Shirokogoroff)가 적은 수의 한국인을 조사했고, 레빈(Levin)은 1930년에 사마르칸트 · 타슈켄트 · 크질오르다 지역으로 강제 이민된 한국인 가운데 남자 486명과 여자 90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1930년대에 와서 많은 일본학자들이 이 방면 연구에 열을 올렸다. 한편, 데베츠(Debets)는 1941년과 1951년 두 차례에 걸쳐 캄차카 어장과 흑룡강 어구에 사는 함경도 출신 한국인 노동자 122명을 상대로 조사하였다.
1946년 레빈은 다시 중산의과대학(中山醫科大學)의 의학생들이1925∼1928년 사이에 야르코(Yarkho)의 지도 아래 북중국인의 체질을 조사한 것과 체보크사로프(Cheboksarov)가 1935년 북중국인을 대상으로 얻어낸 조사결과로 한국인의 체질과 비교하였다. 그는 한국인의 얼굴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① 눈 · 머리카락 및 살갗의 빛깔면에서 섞인 색깔이 많고 머리카락은 거의 차이가 없으며 살갗은 대체로 더 밝은 편이다.
② 털이 더 곱슬거리고 부드러우며 턱수염은 드물고 털이 조금 더 치밀하다.
③ 머리뼈는 길이가 짧고 너비가 크다.
④ 얼굴이 넓고 평평하다.
⑤ 코는 높이가 낮고 뚫려 있는 너비는 크고 코끝과 바닥이 더 솟아 있으며 코의 축은 더 가로로 놓여 있다.
⑥ 입은 윗입술의 높이가 높고 입술전(prochelia)이 넓게 퍼져 있고 두께가 좀 더 두껍다.
⑦ 속눈주름(쌍꺼풀)이 잘 발달되어 있다.
이 밖에 레빈은 요동반도의 만주중국인과 한국인을 견주어보았는데, 요동반도의 중국인이 북중국인보다 한국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길야이크인(Gilyak人)들이 체질상 한국인의 가장 가까운 민족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1930년대 중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해부학교실은 각 도별로 20∼40세의 한국인 남녀 성인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체질계측을 실시하였다. 그 가운데 체질인류학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머리길이[頭最大長] · 머리너비[頭最大幅] · 귀-머리높이[頭耳高徑] · 광대뼈휨너비[頰骨弓幅徑] · 얼굴높이[容貌顔高 및 形態顔高] · 코높이[鼻高] · 코너비[鼻幅] 등의 계측치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지수(指數)가 산출되었다.
머리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머리길이너비[頭長幅]지수는 남자 84.31±0.44, 여자 83.71±0.65로 세계인종의 일곱 가지 머리형 가운데 짧은머리(短頭 : 지수 81.0∼85.4.)에 속한다. 짧은머리를 가지고 있는 인종은 세 곳에 분포되어 있다. 하나는 알프스 지방이고, 그 다음으로 중앙아시아를 들 수 있는데, 그 중심은 소련령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으로 뻗쳐 바이칼호 연안의 부리아트족(Buriat族)에 연결되어 몽고족에까지 이른다. 그 마지막의 것이 한국으로 위의 두 짧은머리집단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한국의 짧은머리가 중앙아시아 짧은머리의 연속으로서 몽고 · 만주를 거쳐 한국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짧은머리는 머리너비가 매우 커져서 형성된 것인 반면, 한국인의 것은 머리길이가 짧아져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성인(成因)이 전혀 다르다. 단지 만주족만은 머리길이가 짧아져서 형성되는 짧은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인과 매우 닮은 머리형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머리길이-귀높이[頭長耳高]지수(머리길이[頭最大長]분의 머리-귀높이[頭耳高徑] ×100)는 남자가 72.19±0.52이고 여자가 71.31±0. 86으로 남녀 모두 심한 높은머리형[高頭型]에 속한다. 이것은 머리길이가 짧고 머리-귀높이가 높은 데 기인하며 인근 민족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의 한 특징이다. 이 밖에 한국인의 얼굴높이와 얼굴너비는 다소 길고 넓은 것이 특징이다. 광대뼈휨너비는 남자 143.42±0.48㎜, 여자 133.72±0.71㎜로서 몽고족이나 만주족보다는 작지만 중국인 및 일본인보다 약간 크다. 한국인의 형태학적 얼굴지수(광대뼈휨너비[頰骨弓幅徑]분의 형태얼굴높이[形態顔高]×100)는 남자가 83.20±0.43, 여자가 81.89±0.70으로 남녀 모두 넓은얼굴형[廣顔型]에 속한다. 코높이-너비[鼻高幅]지수(코높이분의 코너비×100)를 보면 남자 78.29±0.64에 여자 80.01±1.26으로 남녀 모두 중비형(中鼻型)에 속한다.
이들 계측치를 종합하면 한국인의 얼굴에는 짧은머리 · 높은머리 · 높은얼굴 · 넓은얼굴 · 중비형의 체질적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웃 민족들 가운데 일본인, 특히 긴키(近畿)지방 사람의 체질이 한국인의 그것과 제일 가깝다. 일본인에는 짧은키 · 긴머리 · 낮은머리 · 낮은얼굴을 가진 남구주지방 주민이 있어 남방에서 건너온 말레이-몽고형으로 보고 사쓰마형(薩摩型)이라 한다. 한편, 긴키와 산요(山陽)지방 사람은 이와 대조적으로 짧은머리 · 높은머리 · 높은얼굴을 가지고 있고 풍채가 좋으며 조슈형(長州型)이라 한다. 이들은 일본의 지배층으로 한국인과 비슷하기에 한반도에서 건너갔음을 알려준다.
여러 계측치를 다시 나이에 따라 분석하여 얼굴체질이 일생 동안 변해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눈썹은 어린 나이에 성글고 어른이 되면 짙어졌다가 늙으면 다시 성글게 된다. 이마기울기는 어릴 때 곧은 편이 많고 나이가 들면서 기울어지는 비율이 높아진다. 눈두덩은 모두 약하게 발달해 있어서 두드러진 것이 매우 드문 편이다. 얼굴기울기는 덜 넓적한 얼굴이 많고 40세 이후에 점차 넓적한 편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콧마루높이는 나이에 따라 높아진다. 코끝은 들린형 · 수평형 · 드리운형의 세 가지로 나뉘는데, 들린형이 7∼25세까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수평형은 7∼25세까지 늘어나다가 25∼70세 사이에 60% 가까이까지 간다. 드리운형은 25세 이후에 매우 드문 편이다. 콧구멍 생김새는 둥글거나 네모꼴 · 세모꼴 · 달걀형 · 타원형으로 나뉘는데 둥근형과 네모꼴은 차츰 줄어 11세 때 38% 정도에 이르고 그 뒤에 완만하게 줄어든다. 세모꼴 · 달걀형은 7세 때의 52%에서 줄어들었다가 19세 때 60%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20∼70세 사이에는 타원형이63∼78% 정도로 가장 많아진다.
눈코주름(눈물뼈 앞의 눈꺼풀)은 나이에 따라 가장 뚜렷하게 달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로서 7∼19세 사이에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가 점차 줄어들어 40세 이상이 되면 눈코주름이 들려서 물뼈살이 드러나기도 한다. 턱내밀기는 들어간턱 · 곧은턱 · 내민(주걱)턱으로 나눌 수 있다. 남자는 들어간형이 7세 때 63%이다가 15세 때 70%까지 늘고 그 뒤 점차 줄어 40세 때 28%까지 내려간다. 곧은형은 16세 이전에 35%, 17∼40세 이후 44%로 는다. 내민형은 나이가 들수록 많아지는데 8세 2.5%, 19세 20% 정도이다가, 20∼39세 때 25%까지 늘어난다.
이들 항목들을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비교하면 한국인은 누런살갗 · 곧은 머리카락 · 적은 수염 · 눈코주름 · 속쌍꺼풀 등이 그 계통의 특징으로,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가 클수록 오래 전에 갈라졌고 가까울수록 후기에 갈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특징이 잘 보여주듯이 한국인의 얼굴체질이 이웃 민족들의 그것과 뚜렷이 다르다는 것은 한국인이 오랫동안 그들과 떨어져 하나의 유전집단을 이루어온 사실을 가리켜 준다. 짧은머리 · 높은머리 · 넓은얼굴의 면에서도 그것이 두드러진다. 한국인의 갈래는 물론 형질인류학 · 선사고고학 · 언어학 · 민속학 · 신화학 · 유전학 등에서의 연구가 더욱 진행되어야 보다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한국인의 얼굴이 역사 가운데 어떻게 표현되었고, 변모하였는지는 각 예술분야의 작품이나 민속예술 및 구비전승에서 헤아려볼 수 있다. 특히, 고조선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오랜 왕조 역사 속에서 여러 종교가 융성하였다. 그들은 신앙대상으로 다양한 종교예술품을 이루어 오늘날에 남겨 주었고 그 전통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무(巫)의 신령그림[巫神圖], 불교나 도교의 탱화(幀畫) 또는 신선도, 유교의 영정(影幀), 불교의 불상 등이 그런 것들이다.
한편, 문학에서 고대소설이나 가사문학 등에 그 등장인물을 묘사한 것이 있고 구비문학에는 민요 · 속담 · 길조어(吉兆語) 등이 한국인의 얼굴을 여러 모습으로 다루고 있다. 미술면에서는 동양화와 풍속도, 그리고 개화기 이후 서양화 및 조각 등이 한국인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이 방면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 밖에 탈[假面]은 신분사회에서 여러 계층의 얼굴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얼굴에 대한 당시의 이해를 잘 알게 해 준다.
불교가 중국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온 만큼 삼국시대 불상의 범본(範本)은 중국의 불상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의 불상은 중국불(中國佛)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불상에서는 인격(人格)을 초월하여 불격(佛格)을 과시하려는 종교적 상상세계의 얼굴이 표현되지만 그것이 한국에 들어오면 대체로 한국에 걸맞는 얼굴로 변모되고 만다. 다시 말해서 한국화된 불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보기로 평양 부근의 절터에서 나온 고구려의 이불(泥佛)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충청남도 서산 마애삼존불상(磨崖三尊佛像)과 경주 인왕동(仁旺洞)의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도 각기 백제와 신라의 불상으로 그런 면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고구려의 이불은 흙으로 만든 조그마한 불상들인데, 얼굴은 둥글고 복스러우며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운 웃음이 소리없이 퍼지는 뺨의 살이 여간 부드럽지 않다. 서산의 마애삼존불상의 경우 중앙의 여래상은 네모진 얼굴에 크게 뜬 두 눈과 넓은 코를 갖추고 양끝이 살짝 올라간 입가에는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에도 은행을 닮은 두 눈과 미소짓는 입가의 표정이 한데 어울려 온화하면서도 근엄한 인상이 본존(本尊)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왕동 석조여래좌상의 상호(相好)도 동안(童顔)에 지그시 감은 두 눈이 두툼하게 새겨져 있다. 경주 남산의 삼화령미륵삼존상(三花嶺彌勒三尊像)도 같은 신라불상인데, 각기 따로 조성된 주존(主尊) 양 옆의 보살입상은 낮은 키에 어린아이의 귀여운 웃음을 지니고 있어 ‘애기부처’라는 애칭을 받는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이처럼 중국의 것과는 달리 웃음을 띠고 복스러운 얼굴을 지닌 어린아이의 모습을 취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당시 한국인의 얼굴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불상은 어디까지나 종교예배의 대상물이며 종교적 심성(心性)의 예술적 표현이므로 거기에는 그 신앙하는 이들의 종교적 이상(理想)이 일정하게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저들 불상의 얼굴은 따라서 한국인의 종교적 이상형이다. 그리고 그 이상형은 시대에 따라 바꾸어지게 마련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 그 초기에 만들어진 금동불상(金銅佛像)의 얼굴이 아직도 삼국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둥글고 통통한 모습이다. 또한 눈 · 코 · 입 등의 표현도 뚜렷하다. 그러나 그 뒤 점차 신라화의 과정이 진전되면서 불안(佛顔)이 네모지고 넓적해지며 얼굴표정에서도 종교예배상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사라지게 된다. 1964년 보물로 지정된 금동여래입상이 그러한 보기에 해당한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말에는 그 얼굴 크기가 작아지고 부처의 얼굴에 보이던 숭고한 종교성이 많이 감소되어 형식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불상의 얼굴이 점차 토착화해가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한 경향은 고려시대에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춘궁리(春宮里)의 철조석가여래좌상(鐵造釋迦如來坐像)은 가늘고 긴 눈에 광대뼈가 강조된 얼굴을 하고 있다. 대대적으로 조성된 석불상(石佛像)의 경우도 대형화하여 조각적 우수성이 감소되지만 그 넓적한 얼굴은 토착화된 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전통은 고려 후기가 되면 지켜지지 못한다. 밀교적(密敎的) 영향을 띤 원나라 불교가 지배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금동관음보살상(金銅觀音菩薩像)은 삼각형의 얼굴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티베트 · 네팔 계통의 불상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을 강행하였으므로 불상은 이제 예배대상으로서의 숭고한 종교미를 갖추지 못한다. 다만 신체에 비하여 머리부분을 크게 한 특징이 두드러질 뿐이다.
무신도(巫神圖)는 무속에서 섬기는 신령들의 그림을 가리키는 것이고, 불화(佛畵)는 불교의 제반 그림이며, 영정(影幀)은 화상을 그린 족자로 주로 유교의 종교의식에 쓰이고 있다. 영정이 조선시대에 그 수요가 늘고 그에 따라 기법상의 정련(精練)이 거듭되면서 초상예술로 발전하여 간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가 종교화(宗敎畫)의 성격을 띤다.
무는 고조선부터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로 자체의 많은 신령 외에도 불교나 도교의 신령을 받아들여 수많은 신령을 숭배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최영장군(崔瑩將軍) · 태조(太祖) · 대감(大監) 등이 있는가 하면 관운장(關雲長)과 부처도 무의 신령으로서 무당의 신당(神堂)에 모셔진다. 호랑이와 동자(童子)를 거느린 산신(山神)도 무의 중요한 신령이다. 무의 신령이 그토록 다양한 만큼 무신도에 묘사되는 신령의 모습도 각기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 그 복식이나 어떤 상징물을 통해 신령의 신격을 확인할 뿐이고 얼굴모습은 양식화되어 있다. 다만, 신체에 비하여 그 머리부분이 크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신령의 위엄을 높이기 위한 미술적 왜곡(歪曲)으로 보인다.
불화는 장엄 · 교화 · 예배용으로 그려 모셔지는 만큼 얼굴이 위엄스럽거나 자비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것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는다. 예컨대 조선 후기의 경우 부처의 성격이 얼굴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게 되고, 수염이 반드시 표현되거나 코와 입 등이 너무 장식화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영정은 중국에서 발달된 감계적(鑑戒的) 역사화(歷史畫)에서 출발하여 유교적 정교사상(政敎思想)을 구현하는 데에 목적을 둔 것이다. 그래서 군왕도상(君王圖像)이나 공신상(功臣像)을 그려 모셔 그들의 학문이나 덕행, 또는 유풍(遺風)을 기리고 전파하는 방편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일체의 과장이나 외장(外裝)을 피하고 얼굴의 사실적 묘사를 근본으로 하였다. 이것이 불화나 무신도와 크게 다른 점이다.
고대소설 가운데에는 한국인의 얼굴 모습에 관한 묘사와 언급이 많다. 그 가운데에는 전체 얼굴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있는가 하면, 눈 · 코 · 귀 · 입 · 머리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예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인물묘사가 남자를 대상으로 한 보기도 없지는 않지만 여인의 얼굴을 두고 표현한 것이 훨씬 더 많다. 이것은 옛 한국인들의 한국 얼굴에 대한 관심이 주로 여인,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에 크게 두어지고 있었음을 일러주는 것이라 하겠다.
미인의 전체적 인상은 주로 중국의 선녀나 절세미인인 서시(西施) · 양귀비(楊貴妃) · 서왕모(西王母) 등에 비유되고 꽃으로는 해당화 · 모란꽃 · 부용화 · 금련화 · 앵도화 등으로 상징된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옥낭자전(玉娘子傳)』에 “그 아리따운 자태는 마치 서왕모가 요지연에 내린 것이 아니면 월궁 항아 낙포에 내린 것 같더라.”느니, “이를테면 홍련화가 아침이슬에 반개하듯, 해당화가 봄바람에 날리듯하여 진실로 천하의 가인이요 숙녀이더라.”고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중국의 미녀상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드러난다.
미인의 얼굴에 대한 묘사도 비유적인 표현이 적지 않으나, 얼굴 각 부위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또한 많다. 『옥단춘전(玉丹春傳)』에서 한 묘사를 보면 “구름 같은 머리채를 반달같이 둘러업고 버들잎 같은 눈썹을 여덟 팔(八)자로 다듬고 옥 같은 연지볼은 삼사월 호시절의 꽃송이 같고 박속 같은 잇속은 두 이(二)자로 빙그레 웃어 반만 벌리고서…….”라고 하였다. 또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에는 “두 눈의 추파(秋波)는 경수같고……붉은 입술은 앵무 단사(丹砂)를 문듯하니 천고무쌍이요 일세독보의 가인이었다.”라고 그리고 있다. 이러한 묘사에서는 옛 한국인들이 여인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끼고 살았던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고대소설에 나타난 미인의 상은 용모로만 따지지 않고 몸매도 함께 가늠하였다. 『구운몽』에서 적경홍(狄驚鴻)의 아름다움을 “가는 눈썹과 밝은 눈이며 구름 같은 살쩍과 꽃 같은 뺨이며 가는 허리와 눈빛 같은 흰 살이…….”라고 하였는데, 그 한 보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옛 미인의 조건을 얼굴에 제한하여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둥글게 다듬어진 검은 눈썹, 희고 고운 살빛, ② 별빛처럼 맑고 젖어 있는 가는 눈, ③ 탐스럽고 붉고 작은 입술, ④ 적당히 둥글고 불그레한 뺨, ⑤ 흰 살빛, 특히 귀밑 부분이 강조됨, ⑥ 희고 고른 이 등이다. 이러한 조건에는 얼굴 각 부위의 색감조화가 강조되어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즉, 검은 눈썹에 맑은 눈, 불그스레한 빰에 붉은 입술, 거기다 흰 이와 살빛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얼굴 각 부분의 적당한 크기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가는 눈이나 작은 입술이 그러한 것이다. 이 점은 『박씨전(朴氏傳)』에서 추한 여인의 용모로 들먹인 “높은 코와 내민 이마며 왕방울 같은 큰 두 눈”으로 보아도 분명하다. 미인의 기준이란 물론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지만, 고대소설에 나타난 것을 보면 옛 한국인들은 대략 위와 같은 조건을 취했던 것 같다.
불상이나 무신도 · 불화, 또는 고전소설에 보이는 한국인의 얼굴이 한국인의 종교 또는 미인의 이상형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데 비하여 탈은 사회의 여러 신분계층의 얼굴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탈은 이미 상고시대에 만들어져 초자연적 존재, 즉 신령의 얼굴을 취하였다. 그래서 신의 강림을 뜻하는 종교적 성격을 가지던 것이다. 그러한 전통은 신라에서 시작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던 붉은 처용(處容) 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탈은 악귀를 쫓아준다고 믿었기에 궁중에서 잡귀를 쫓는 나례(儺禮)의 중심 의식무(儀式舞)로서의 처용무에 쓰였고, 고려시대에 그 춤은 궁중의 연락무(宴樂舞)로 고관들이나 심지어 국왕까지도 즐겨 추었다.
그러나 탈은 점차 예능가면(藝能假面)으로 그 기능이 변화하여갔다. 특히,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택한 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였으므로, 전조(前朝)의 연등회(燃燈會)나 팔관회(八關會) 등의 공식행사에서 벌어지던 나례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점차 놀이로 변해갔다. 그리고 탈춤은 신분사회의 모순과 허울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민중의 놀이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탈과 탈춤이 가진 종교적 성격이 전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탈춤이 신분사회가 가져오는 사회적 갈등을 다시 조화(調和)로 이끄는 기능을 여전히 수행하였던 점을 결코 지나쳐 볼 수 없다.
하회별신(河回別神)굿 탈놀이의 탈에서 우리는 그런 면을 확인할 수 있다. 하회별신굿 탈놀이에 보이는 탈들은 그 등장인물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눈매와 입매, 눈두덩과 광대뼈, 이마와 콧대, 볼과 주름살 등의 높이와 깊이, 선의 방향 및 면의 양감 등을 살리고 색깔의 종류와 농도 및 전체 얼굴의 균형을 달리하여 각 등장인물의 성격을 개성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먼저 탈의 전체적 균형과 이목구비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얼굴은 대체로 좌우의 균형을 이루는 법인데 인물에 따라서는 불균형을 이루는 것도 있다. 이목구비가 가장 반듯한 것은 양반탈이고, 불균형이 가장 심한 것은 초랭이탈이다. 이들은 둘 사이의 주종관계(主從關係)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얼굴의 가로선, 즉 좌우모양이 초랭이처럼 사선으로 비뚤어진 것으로는 이매(魑魅)탈이 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세로선, 즉 콧날이 휘어진 예는 부네탈과 각시탈에서 보인다. 가로선이 수평을 이루지 못한 탈이 신분적 억압을 받는 이들의 표정이라면, 세로선이 수직으로 되지 못하고 기울어진 탈은 여성으로서의 성적 차별을 받는 이의 표정이 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광대뼈와 눈매에서도 나타난다. 광대뼈 또는 볼의 좌우가 불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선비탈과 초랭이탈이 있다. 선비의 광대뼈는 툭 불거진 눈매를 감싸면서 왼쪽이 위로 곡선을 이루는 반면, 오른쪽은 직선으로 꺾인 듯 날카롭다. 그래서 왼쪽 눈매는 부드럽게 보이나 오른쪽의 것은 날카롭게 부라리는 듯하다. 초랭이의 광대뼈는 입매를 감싸면서 왼편은 위쪽이 툭 불거져 있고 오른편은 아래쪽이 곡선의 볼주름을 이룬다. 그리하여 왼쪽 입매는 화난 듯 보이고 오른쪽의 것은 웃는 모습이다.
탈놀이에서 초랭이와 선비는 모두 양반과 맞서는 관계를 짓고서 양반을 공격하는데 그 공격방식이 그들 얼굴모습처럼 각기 다르다. 초랭이는 툭 불거진 눈매와 옥다문 입매로써, 또는 험악한 말씨로 양반을 공격한다. 그러다가 양반의 호령이 떨어지면 얼른 웃는 입매를 지어야 한다. 그러나 선비는 초랭이처럼 천한 표정을 짓지 않고 교활하게 웃는 여유있는 눈매와 부릅뜬 눈초리로 양반과 맞선다. 일단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나 기회가 닿으면 양반의 허점을 찌르려고 공격적인 눈초리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초랭이와 같은 미천한 아랫것들이 험악한 입놀림으로 양반과 맞서는 데 비해, 선비는 지성인으로서 번뜩이는 눈초리를 가지고 양반과 맞서는 셈이다. 자기보호를 위하여 이들은 그러한 이중적 입매와 눈매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좌우의 눈매가 불균형을 이루는 것은 각시탈로서, 왼쪽 눈은 아래로 다소곳이 내리깔았으나 오른쪽 눈은 정면을 응시한다. 주위의 상황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던 새각시는 겉으로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태를 정확히 분별하려는 오른쪽의 눈은 정면을 직시한다.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 하는 각시의 사회적 삶이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눈매를 가지고 하회탈의 성격을 크게 둘로 나누어볼 수 있다. 실눈을 하고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양반 · 이매 · 중 · 부네 및 백정의 탈이 한쪽이고, 툭 불거진 동그란 눈을 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초랭이 · 선비 및 할미탈이 다른 쪽이다. 실눈의 탈은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낙관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것이라면, 불거진 눈의 탈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항상 저항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두 편의 구체적인 모습은 인물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백정의 눈이 실눈에 속하지만 눈꼬리를 특히 위로 치켜뜨고 있어 웃는듯하면서도 또한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그런 보기에 해당한다.
주름살도 탈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다. 주름살의 다소에 따라 여유있고 구김살 없는 삶을 사는 인물과 찌들고 억압받는 삶을 사는 인물의 표정이 강조된다. 주름살의 깊고 얕음에 따라 노소의 정도를,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 웃는 표정과 화난 표정이 잘 드러난다. 백정 · 할미 · 중 · 선비의 탈은 깊고 많은 주름살을 가진 반면, 양반 · 이매 · 초랭이의 탈에는 상대적으로 주름살이 적고 얕은 편이다. 할미 · 선비나 중은 늙기도 하였거니와 생활상의 여러 제약 때문에 주름살이 늘게 마련이다. 백정은 젊기는 하나 워낙 삶에 찌들기도 했고 그 위협적인 인상의 탓으로 주름살이 많고 깊다. 나이가 많기는 양반도 마찬가지지만 생활고를 모르는 윤택한 신분이기에 주름살이 적다. 초랭이와 이매는 생활의 제약을 직접 받는 아랫것들이나 아직 젊다. 더구나 바보스런 이매의 얼굴에는 생활의 찌들음이 나타날 리 없고, 매사에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초랭이는 찌들음에 꺾일 인물이 결코 아니다.
탈의 인물에 따른 성격묘사에 색깔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초랭이 · 중 · 선비탈은 암자색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주어진 삶에 대하여 정열적이고 투쟁적으로 대처하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자기세계를 극복해가는 인물을 그려 준다. 이에 반하여 미색계통의 양반탈과 이매탈은 제 구실도 못하고 자기세계를 침범당하는 무력하고 어리석은 인물을 나타낸다. 그리고 미색 바탕에 백분화장을 한 부네와 각시탈에는 젊은 여성의 부드러움과 연약함이 드러나 있다. 반면 암황색의 할미와 백정의 탈에는 경제적 · 성적 · 신분적 차별에 따른 소외집단의 어두운 표정이 나타나 있다. 이처럼 색깔이 주는 분위기와 인물의 성격이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다.
18세기 후반 이래 우리 나라 미술가에 의하여 제작된 미술품은 동양화 · 서양화 및 조각에 걸쳐 많은 양에 이른다. 이들은 우리 나라 사람의 얼굴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특히, 동양화는 산수화(山水畫) · 풍속도 · 도석화(道釋畫) · 미인도 및 인물화의 여러 갈래에서 한국인의 얼굴에 관한 전통적 인식을 알게 해준다. 여기서 근대란 1770년에서 1960년에 이르는 약 200년의 기간으로서 한국미술의 변화가 컸던 때이기에 일본에 의한 국권강탈과 광복을 기점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1770∼1910)에는 한국인에 의하여 제작된 서양화와 조각의 예가 기록에 나와있지 않고, 동양화로서 산수화와 풍속화와 도석화가 주종을 이룬다. 미인도는 신윤복(申潤福)의 것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들 가운데 도석화의 인물을 보면 신체에 비하여 머리가 매우 크게 묘사되어 있고, 산수화 속의 인물도 도석화의 것에는 약간 떨어지지만 제법 머리가 크다. 이에 비하여 풍속도에 묘사된 인물들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도석화 속의 인물은 전부 신선(神仙) 또는 도인(道人)으로서 남자이고, 산수화의 경우 또한 그 인물들이 그런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남성적인 면을 미술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한 듯하다. 반면 풍속도 속의 인물의 머리 크기는 한국인의 생체실측의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실학사상의 경향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에서의 머리 묘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의 머리는 크게, 낮은 사람의 머리는 작게 나타난다. 이런 점은 신선이나 도인의 앞이마 · 미간(眉間) · 머리꼭대기[頭頂] 등을 크게 그려 뇌두개(腦頭蓋, neurocranium)를 강조하고, 그것으로 남성의 원숙(圓熟)과 귀(貴)한 면을 표현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제2기(1910∼1945)에 오면 동양화 작가들은 주로 미인도와 인물도를 많이 그리는데, 인물묘사에 있어서 제1기보다는 덜하지만 얼굴부위에 초점을 두고 머리를 크게 그리는 경향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인의 얼굴을 보여주는 작품은 서양화와 조각에서 훨씬 많다. 특히, 1930년대 이후는 대부분 여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러 미술부문 가운데 서양화에 묘사된 한국여인의 머리크기는 이때로부터 실제 크기에 가까워지는데, 나체화의 경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인체의 비례미에 치중한 심미적 과장의 결과로 보인다. 또, 얼굴높이-머리높이 지수를 보면 이 시기 작품에 나타난 한국인 어른의 생체계측치(남녀 각기 52.93 및 52.13)와 별반 차이가 없으나 남자에 비하여 여자의 것이 상대적으로 작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여성을 앳되게 보이게 하려는 제작상의 기술에서 기인한다.
끝으로 제3기(1945∼1960)에는 작가들이 주로 여자의 얼굴을 많이 표현한다.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을 탈피한 면모가 여기서 두드러지게 보인다. 인물화에 있어서 여자의 머리크기는 실측치보다 작고, 팔등신미인(八等身美人)의 것에 가까워지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이 점은 조각에서도 마찬가지다. 정규 미술대학에서 미술해부학을 공부한 젊은 미술가가 많이 배출되었고, 또 그들 주변의 젊은 여성이 모델로 선택되었기에 그러한 경향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관상(觀相)은 상(相)을 보아 그 사람의 심정과 성격을 헤아리고 나아가 영고(榮枯) · 부귀 · 화복 · 요수(夭壽) · 현우(賢愚) 등의 운명재수를 판단하여 미래에 닥쳐올 흉사(凶事)를 예방하고 초복(招福)하려는 점법(占法)이다. 상법(相法)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하여 한국에 전해진 것이다. 고대 중국의 황제(黃帝)나 주(周)나라에 기원을 둔다는 설이 있으나, 상법은 당송대(唐宋代)에 와서 완성을 보았다. 그리하여 『마의상법(麻衣相法)』 · 『수경집(水鏡集)』 · 『신상전편(神相全篇)』 · 『풍감원리(風鑑原理)』 · 『면상비급(面上秘笈)』 등이 이루어져 오늘에 전한다. 이 가운데 『마의상법』은 한국의 상술(相術)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상에서는 얼굴의 골격 · 색택(色澤) · 주름살 · 점(點)이나 안면의 표정이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이것만이 대상인 것은 아니다. 그 밖에 손발의 형상, 신체거동의 특징, 음성 등을 함께 따진다. 그래서 신체의 상은 얼굴 · 뼈 · 손 · 눈썹 · 코 · 입 · 귀 · 가슴 · 발의 생김새에 따라 면상(面相) · 골상(骨相) · 수상(手相) · 미상(眉相) · 비상(鼻相) · 구상(口相) · 이상(耳相) · 흉상(胸相) · 족상(足相)으로 나뉘고, 동작에 있어서도 행(行) · 좌(坐) · 와(臥) · 식(食) 등으로 구분되며, 각기 그 특징에 따라 점친다. 그러나 관상의 중심은 역시 얼굴이다. 오관(五官) · 육부(六腑) · 삼재(三才) · 삼정(三停) · 오성(五星) · 육요(六曜) · 오악(五嶽) · 사독(四瀆) · 십이궁(十二宮) · 사학당(四學堂) · 팔학당(八學堂) 등을 잡고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상을 본다.
오관은 귀 · 눈썹 · 눈 · 코 · 입을 가리킨다. 육부는 얼굴을 좌우로 양분하고 각기 상 · 중 · 하의 부(腑)로 나누어 관상한다. 삼재는 이마 · 코 · 턱을 천지인(天地人)으로 구분한다. 삼정은 삼재와 같은 위치를 상 · 중 · 하정(停)으로 나눈다. 오성은 금성(金星)을 왼쪽귀, 토성(土星)을 코, 화성(火星)을 이마, 수성(水星)을 입, 목성(木星)을 오른쪽귀에 배치한 것이다. 육요는 태양성(太陽星) · 월패성(月孛星) · 자기성(紫氣星) · 태음성(太陰星) · 나후성(羅喉星) · 계도성(計都星)으로 나뉜다. 오악은 오른쪽 광대뼈 · 왼쪽 광대뼈 · 이마 · 턱 · 코를 각기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으로 잡아 거기에 태산(泰山) · 화산(華山) · 형산(衡山) · 항산(恒山) 및 숭산(崇山)이 배치된다.
사독은 귀 · 눈 · 입 · 코를 각기 강(江) · 하(河) · 회(淮) · 제(濟)로 배정한다. 십이궁은 얼굴의 각 부위를 명궁(命宮) · 재백(財帛) · 형제(兄弟) · 전택(田宅) · 남녀(男女) · 노복(奴僕) · 처첩(妻妾) · 질액(疾厄) · 천이(遷移) · 관록(官祿) · 복덕(福德) · 상모(相貌)로 나누어 관상하는 것이다. 사학당에서는 눈을 관학당(官學堂), 귀를 외학당(外學堂), 이마 가운데의 인상(印上)을 녹학당(祿學堂), 입을 내학당(內學堂)으로 한다. 팔학당은 눈썹을 반순학당(班笋學堂), 눈을 명수학당(明秀學堂), 이마를 고광학당(高廣學堂), 입술을 충신학당(忠信學堂), 귀를 총명학당(聰明學堂), 윗이마를 고명학당(高明學堂), 인당(印堂)을 광대학당(光大學堂), 혀를 광덕학당(廣德學堂)으로 나누어 부귀 · 복덕 · 관록 · 수명 등을 점친다.
얼굴을 여러 부위로 나누어 상을 보는 이러한 법들의 한두 예를 오악과 사학당에서 살펴보면, 먼저 오악에서 중악은 두 눈 사이에서 콧등까지를 말하는데, 두둑하고 높아야 좋다. 중악인 코가 세력이 없으면 네 곳[四嶽]의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비록 다른 곳이 모두 좋아도 크게 귀함이 없고 권세가 없으며 오래 살지 못한다. 또, 코가 짧으면 명이 길지 못하다. 코가 뾰족하고 살이 없으면 말년에 패(敗)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남악인 이마가 평평하지 못하고 뒤로 누운 것같이 넘어지면 패하는 수가 많고, 가세가 길지 못하다. 북악인 턱이 뾰족하고 쪼그라져 있으면 말년에 벼슬을 못하고 되는 일이 없다. 두 광대뼈가 동서악이 되는데, 그것이 틀어지고 세력이 없어 나타나지 않으면 악독하고 인정이 없다. 오악이 각기 바라보는 듯 서로 향하고 있어야 좋다고 한다.
팔학당의 경우, 이마의 고명학당은 둥글고 뼈가 두둑하게 솟아야 좋으며 고광학당은 빛깔이 윤택하여야 하고 뼈가 모나게 일어나 있어야 좋다. 광대학당인 인당은 평평하고 윤기가 있으며 흉터가 없어야 좋다. 명수학당인 눈은 검은 창이 많고 흰 창이 적어야 한다. 총명학당인 귀는 귓바퀴가 분명하고 그 빛깔이 희거나 붉거나 누렇게 된 것이 좋다. 충신학당인 이는 가지런하고 잇새가 총총하며 이의 빛깔은 은빛과 같은 흰색이어야 좋다. 광덕학당인 혀는 길이가 코끝까지 닿고 빛깔은 붉은 것이 좋다. 반순학당인 눈썹은 굽은듯하고 한결같이 길어야 한다.
이러한 상법은 한국인의 얼굴 판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 고대소설이나 속담 등에서 그런 점이 확인된다. 고대소설에서는 『구운몽』에 양소유(楊少游)의 관상을 보면서 “두 눈썹은 다른 사람과 달리 봉의 눈이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털, 귀밑털)을 향하였으니 벼슬이 삼정승에 이를 것”이라 하고, 또 “얼굴빛이 분을 바른듯하고 둥근 구슬 같으니 이름이 장차 천하에 들릴 것이다.”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속담에는 얼굴의 각 부위를 두고 상의 길흉을 말한 것이 또한 적지 않다. 예컨대 ‘이마가 벗어지면 공것 즐긴다.’, ‘사주에 없는 관을 쓰면 이마가 벗어진다’, ‘귀가 보배다.’ 또는 ‘귀 작으면 앙큼하고 담대하다.’는 속담도 있다. ‘밥이 얼굴에 덕적덕적 붙었다.’는 것은 얼굴전체의 유복한 상을 두고 쓰는 속담이다.
고대소설이나 옛 미술작품에는 한국의 전통적 미인상을 묘사한 것이 있어 그 대강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 그것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고 다분히 관념 속에 형성된 것의 표현이었다. 그런만큼 미인이란 얼굴의 각 부위가 주는 부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세계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우러나는 아름다움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보름달같이 둥글넓적한 아름다운 얼굴이 그러한 것인데, 여기에는 밝고 원숙하고 조화되어 있는 미인상이 강조되어 있다. 미인의 전체 기준이 그렇다 하더라도 미인의 얼굴 각 부위는 또한 일정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전체 얼굴바탕의 조화에 어울려야 하였다.
옛 작품들에 그런 표현이 두루 나타나는데 그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얼굴형은 전체적으로 둥글지만 얼굴 윗부분, 즉 앞머리부분[前頭部]을 특별히 강조하고 아랫턱부분을 약화시켰는데, 이것은 요컨대 계란형의 얼굴을 말한다. 이러한 얼굴은 한국여인의 유년기 얼굴의 특징이다. 따라서 옛 미인의 얼굴은 어리고 앳된 얼굴로 표현되었고 그것이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고대소설에 등장하는 여자주인공의 나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구운몽」의 적경홍은 열 살부터 절묘한 재색이 널리 소문났고, 심청(沈淸)은 열다섯 살 때 얼굴이 나라에서 첫손을 꼽는 국색이라 하였고, 「윤지경전(尹知敬傳)」의 연화는 나이 열세 살에 용모의 고움이 장강에 비겼으며, 춘향(春香)의 나이 또한 열여섯 살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는 왕조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여인의 성숙도가 빨랐던 점도 아울러 헤아려야 한다. 어쨌든 옛 미인의 얼굴생김새는 10대 중반의 것이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코는 길고 코너비는 좁고 코허리는 낮은 것이 특징이었다. 옛 미인은 또한 살이 통통한 뺨과 작은 입에 쌍꺼풀이 없는 가는 눈을 가졌다. 눈 사이는 먼 것을 아름답게 보았고 눈썹은 흐린 색깔에 반달형을 이상형으로 보았다. 고전작품 속에는 미인의 귀너비가 작게 나타난다. 그 전체 인상은 어리고 얌전하면서 정적인 반면 지성미를 풍긴다. 미인의 이러한 고전적 기준은 한국사회가 서구화되면서 크게 달라진다.
근대미술에 나타난 한국여인의 얼굴변화는 앞서 본 바 있거니와, 특히 미스코리아선발을 거치면서 현대의 미인상이 점차 잡히고 있다. 그 기준에 의하면 현대미인의 얼굴은 상 · 중 · 하부가 균형있게 조화를 이룬 비너스형을 취한다. 그 각 부위를 살펴보면 뺨은 광대뼈가 나와 홀쭉하고, 눈썹은 짙은 색깔에 끝이 올라가고, 눈두덩은 좁으며 눈은 큰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쌍꺼풀이 있어야 하고, 코는 3등분을 이루고, 코허리는 높은 편이다. 눈 사이는 좁고, 큰 입이 강조된다. 이러한 얼굴에는 동적인 눈과 야성적인 입이 두드러지며 그것은 전체적으로 조화있는 성숙한 얼굴형을 이룬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서구화에 따라 미인의 기준이 서양인의 것에 맞추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