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영(吳知泳, 1868~1950)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원암(源菴)이다.
1891년 3월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3년 익산농민항쟁의 장두(狀頭)로 활약하였다. 1894년에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익산 도접주(都接主) 김방서 휘하에서 중견 간부로 활약하였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당시 충청도 공주와 논산 일대에서 정부군과 벌인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후 은신하다가 1896년에 북접계 도접주 장경화를 만나 동학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재기하였다. 손병희가 1906년 1월 귀국하면서 천도교 창건을 선포한 후 천도교 지도자로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06년에 익산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09년에는 천도교중앙총부 이문관 서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에는 전제관장에 임명되어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으로 이주하였다.
3 · 1운동이 일어나고 천도교 지도부가 운동 자금 마련을 시도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적발되었을 때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조선교육회, 사상강구회와 같은 사회단체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말부터 천도교 혁신파의 중심 인물로 천도교 혁신운동에 나섰다. 천도교 혁신운동의 목적은 교단의 민주적 운영을 통해 인맥 · 파벌 중심의 중앙 집중제에서 벗어나 지방 교구 중심의 자치적 운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혁신운동은 손병희의 반대와 기존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에 밀려 좌절되었다. 천도교 혁신파는 1925년 천도교단을 이탈해 천도교연합회를 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