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영 ()

근대사
인물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혁신운동을 벌인 동학 및 천도교 지도자.
이칭
원암(源菴)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8년
사망 연도
1950년
본관
해주(海州)
출생지
전라북도 고창군
주요 저서
동학사|신인내천|새사람과 새한울
주요 경력
천도교연합회 결성
관련 사건
동학운동|천도교 혁신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오지영은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혁신운동을 벌인 동학 및 천도교 지도자이다. 동학운동에 참여한 천도교 혁신파의 지도자이다. 1920년대 초반 천도교 민주화를 요구하는 혁신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천도교연합회를 만들어 천도교단을 이탈하였다.

정의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혁신운동을 벌인 동학 및 천도교 지도자.
인적사항

오지영(吳知泳, 1868~1950)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원암(源菴)이다.

주요 활동

1891년 3월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3년 익산농민항쟁의 장두(狀頭)로 활약하였다. 1894년에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익산 도접주(都接主) 김방서 휘하에서 중견 간부로 활약하였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당시 충청도 공주와 논산 일대에서 정부군과 벌인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후 은신하다가 1896년에 북접계 도접주 장경화를 만나 동학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재기하였다. 손병희가 1906년 1월 귀국하면서 천도교 창건을 선포한 후 천도교 지도자로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06년에 익산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09년에는 천도교중앙총부 이문관 서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에는 전제관장에 임명되어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으로 이주하였다.

3 · 1운동이 일어나고 천도교 지도부가 운동 자금 마련을 시도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적발되었을 때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조선교육회, 사상강구회와 같은 사회단체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말부터 천도교 혁신파의 중심 인물로 천도교 혁신운동에 나섰다. 천도교 혁신운동의 목적은 교단의 민주적 운영을 통해 인맥 · 파벌 중심의 중앙 집중제에서 벗어나 지방 교구 중심의 자치적 운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혁신운동은 손병희의 반대와 기존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파에 밀려 좌절되었다. 천도교 혁신파는 1925년 천도교단을 이탈해 천도교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학문과 저술 · 사상과 작품

1926년 3월 익산 농민 200여 명을 인솔하여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7개 지역으로 나누어 토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경영하였다. 이 무렵에 『 동학사(東學史)』 초고를 저술하였다. 1935년에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으로 돌아와 이듬해에 『신인내천(新人乃天)』, 『새사람과 새한울』을 간행하였다. 『동학사』는 1940년에 영창서관에서 출간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오지영, 『동학사(東學史)』(영창서관, 1940)

논문

김정인, 「『동학사』의 편찬 경위」(『韓國史硏究』 170, 한국사연구회, 2015)
김태웅, 「1920 · 30년대 吳知泳의 활동과 『東學史』 간행」(『역사연구』 2, 역사학연구소, 1993)
노용필, 「오지영의 인물과 저작물」(『동아연구』 19, 서강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1989)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