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연집(二禮演輯)』은 풍계(楓溪) 우덕린(禹德麟, 1799~1875)이 고금의 예서를 참고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가운데 19세기 당시 실제로 행하여지는 예(禮)의 내용과 절차를 모아 만든 책이다. 4권 4책의 필사본과 1927년에 간행한 연활자본이 전해지고 있다.
우덕린(禹德麟)의 자는 명수(明叟), 호는 풍계(楓溪),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생애와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양호당(養浩堂)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후손이며, 족손(族孫) 우상훈(禹相勛)의 발문에 따르면 스승 없이 홀로 뜻을 돈독히 세워 경전을 공부하며 스스로 깨달아 알아냈다고 한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다고 하는데, 『이례축식찬요(二禮祝式簒要)』의 서문을 보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 조유선(趙有善, 1731~1809)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이 책은 필사본과 연활자본 두 가지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필사본은 4권 4책 536면의 10행 22자이다. 주쌍행에 상하내향사엽화문어미(上下內向四葉花紋魚尾)이고 판심(版心) 윗부분에는 ‘이례연집’ 일(一), 이(二), 삼(三), 사(四)를 적었다. 판심 가운데에는 상복편(喪服篇), 상복제절(喪服制節), 효대총론(絞帶總論) 등의 세부 조목과 면수를 적어 열람하기 편하게 하였다. 책의 첫머리에는 김평묵(金平默)의 서문이 있다. 이 필사본을 원본으로 간행한 연활자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0행 20자에 4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1891년에 쓴 김평묵의 서문과 1924년에 족손 우상훈이 쓴 발문, 1925년에 재종증손 우석형(禹錫亨)이 쓴 발문이 있으며 1927년에 간행하였다.
우덕린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양육되었는데, 아버지의 가르침이 없이 자라 큰 허물을 짓게 될 것을 염려하여 고금(古今)의 예서를 취하고 상변례(常變禮)를 참고하여 30여 년 동안 공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례연집』을 완성하였는데, 이례(二禮)는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말한다. 이 두 가지 예를 중심으로 논하고 있기 때문에 『이례연집』이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책의 뒷부분에 관례(冠禮)와 혼례(婚禮)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덧붙이고 있어서 사례(四禮)를 모두 다룬 예서라고 하겠다. 우석형이 쓴 발문을 보면 우덕린이 세상을 떠난 2년 후에, 우석형의 아버지가 『이례연집』에서 축식을 가려 뽑아 『이례축식찬요(二禮祝式簒要)』를 간행하였다. 우덕린의 막내아들 우동연(禹東淵)이 1891년에 김평묵에게 서문과 교정을 부탁하여 책의 간행을 준비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 후 우동연의 장남 우윤면(禹允冕)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족손 우상훈에게 발문을 청하였고, 드디어 1927년에 이 필사본을 원본으로 한 연활자본이 간행된 것이다.
필사본의 목차를 크게 나누어 보면 권1은 상례, 상변례(喪變禮)이고, 권2는 장례, 장변례(葬變禮)이며, 권3은 상제례, 권4는 상사례(常祀禮), 부(附) 변례(變禮), 관례, 혼례이다. 권1은 다시 「권지일상(卷之一上)」 상복편과 「권지일(卷之一)」 상례로 나뉜다. 권2는 장례와 장변례로써 천광(穿壙), 조주(造主), 계빈(啓殯), 조조(朝祖)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예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봉구조조도(奉柩朝祖圖)>와 <봉혼백대구조조도(奉魂帛代柩朝祖圖)>를 그려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권3은 상제례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제사를 지내는 날 먼저 차려 놓는 <선설소과도(先設蔬果圖)>를 그려 넣었다. 권4는 상사례로서 사당(祠堂), 신알(晨謁), 기제(忌祭), 묘제(墓祭), 생신제(生辰祭) 등을 설명하고 관례, 혼례, 회혼, 회갑 등을 논하였다. 이 ‘상사례’는 『주자가례』의 제일 앞에 있는 통례를 대신한 것인데, 이 책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배치하여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예제를 수립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회혼례는 부부가 된 지 60년이 되는 해에 거행하는 예를 말한다.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는 예문에 없기 때문에 행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도암(陶菴) 이재(李縡)는 상을 차리지 않고 자손들이 술잔을 올리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회갑례와 회혼례를 관혼상제(冠婚喪祭)와 함께 기록하였으며, 이러한 기록은 이후 출간되는 예서에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당시 행하던 여러 가지 시속례의 예를 총망라한 것이다. 앞선 예학자들은 『주자가례』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예에 맞다고 하였으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우덕린은 시대 변화에 따른 변례와 시속례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예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시의성(時宜性)을 말하였다. 이 책은 19세기를 살았던 우덕린이 시속례를 대거 반영하여 서술한 예서로서 당시 변례와 시속례를 알 수 있다는 점과 이후 출간되는 예서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