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8년( 영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양구현감을 지내던 중에 1754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무학(懋學) · 근정(勤政) · 신질(愼疾) · 납언(納言) 등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헌납(獻納) · 교리 · 승지 · 대사간 · 이조참의, 예조 · 병조 ·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1772년 당시 대제학으로 현종의 상호(上號)를 지어 바치고 영조에게서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1773년 한 때 사직했으나, 이듬 해 다시 이조참판으로 증광시 시관(試官)에 임명되고, 177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행장 · 시장(諡狀)을 찬술하기 위한 찬집청(撰集廳)의 당상에 임명되었고, 영조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바쳤다. 우참찬 · 병조판서 · 명의록찬집당상(明義錄纂輯堂上) · 형조판서 · 규장각제학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나, 관아를 비웠다 하여 강화유수로 좌천되고 이어 사형수의 자살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다시 1780년(정조 4)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형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 · 판중추부사 ·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 세자부(世子傅) · 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동안 1783년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 1790년 동지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783년 종부시에서 간행한 『선원계보기략팔고조도(璿源系譜紀略八高祖圖)』의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해 이치를 주로 했고, 특히 사명(詞命)에 뛰어나 정조가 신설한 규장각에서 활약하였다. 김익(金熤)과 동시에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소박한 선비 차림이었고 행실이 독실해 당시 유상(儒相)으로 불렸다 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는 『천령향함이지락(千齡享含飴之樂)』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