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에 덕흥서림(德興書林)에서 간행한 바 있다. 「임오군란기」는 임오군란의 전말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실기체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1882년(고종 19) 대원군의 섭정으로 부국강병에 힘입어 군기가 일신되지만, 민씨(閔氏) 일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차츰 국고가 탕진되어 군사들의 봉급도 주지 못할 형편이 된다.
일본과 통상을 체결하여 공사가 거주하게 되고 정부는 일본의 제도를 모방하게 된다. 임오년 6월 9일 정부가 밀린 군량을 배급하면서 썩은 쌀에 모래까지 섞어 배급하자 군사들은 화가 극에 달한다. 특히 창리(倉吏)가 민씨 일가의 원흉 민겸호(閔謙鎬)의 하인이라는 데 격분하여 창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킨다.
민겸호가 군사들의 처형을 명하자 이들은 대원군의 힘을 빌려 일본공사관을 습격한다.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인천으로 피난하고, 민비는 상궁복장으로 옷을 바꿔 입고 충주 장호원(長湖院) 산중에 숨는다. 군사들은 민씨 일족을 해치고 영의정이며 대원군의 형인 흥인군도 죽인다.
민비는 역관 변원규(卞元圭)를 경성에 보내 왕에게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도록 한다. 청나라는 위안스카이[袁世凱] 등의 인솔로 남양만에 상륙하여, 대원군을 청나라로 잡아가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청나라가 일본의 세력을 제어하자 일본은 군란 중 입은 피해보상을 요구하게 되고,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일본의 군대를 끌어들인다. 군란이 민왕후와 대원군의 싸움으로 그치지 않고, 대원군이 환란을 수습한 뒤에도 민왕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여 멸망을 자초한다.
이 작품은 임오군란의 시말을 흥미 본위로 기술한 것이다. 말미에서 “임오군란이 대원군의 진무(鎭撫)로 이미 평정되었거늘 민파(閔派)들은 무슨 까닭으로 청병(淸兵)을 불러왔는고?”라 한 것을 보면, 작자가 대원군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 내란으로 시작된 이 난은 마침내 조선·청·일본 삼국의 미묘한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대내적으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이 노출되어 뒷날의 갑신정변의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