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성은 정씨(鄭氏). 첫 법명은 영신(永信). 법명은 전강(田岡). 전라남도 곡성 출신. 아버지는 해룡(海龍)이며, 어머니는 황계수(黃桂秀)이다. 만공에서 이어지는 선종 제77대의 법맥을 전수하였고 용화사법보선원, 용주사중앙선원 등을 창설하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恩師)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진하였다.
예산 보덕사(報德寺) · 정혜사(定慧寺) 등에서 피를 쏟고 머리가 터져가며,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던 중, 23세 때인 1921년에 개오(開悟)하였다. 이때부터 당대의 선사들을 순례하며 인가(印可)를 받았다.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에게 찾아가 탁마(琢磨)하였으며,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을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에게는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을 찾아갔으나 인가를 받지 못하여, 다시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정진하였다. 반 철 만에 마조(馬祖)의 원상(圓相) 공안의 뜻이 드러나면서 깨달음을 얻고 만공의 인가를 받았다. 그 뒤, 주요 공안에 대한 탁마를 두루 마친 뒤, 만공은 전법게로서 선종 제77대의 법맥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깨달음을 위해 힘썼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다가,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 영가(靈駕)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마지막 설법을 한 뒤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전법(傳法) 제자인 송담을 비롯하여, 정공(正空), 정우(正愚), 정무(正無), 정대(正大), 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전강법어집』이 있으며,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설법한 700여 개의 육성 테이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