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영 ()

근대사
제도
조선 말기, 충청도 청주에 설치하였던 군영(軍營).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1887년(고종 24)
폐지 시기
1895년(고종 32)
주관 부서
친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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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진남영은 조선 말기, 충청도 청주에 설치하였던 군영(軍營)이다. 고종 대에 중앙의 친군영 체제가 지방으로까지 확대됨에 따라 1887년 충청도 청주에 설치된 군영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는 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장졸이 살해된 바 있다. 갑오개혁 시기 폐지되었다.

정의
조선 말기, 충청도 청주에 설치하였던 군영(軍營).
제정 목적

친군영 체제가 지방으로까지 확대됨에 따라 1887년(고종 24)에 경상 감영남영(南營), 전라감영에 무남영(武南營), 함경도 경성에 북영(北營), 강원도에 진어영(鎭禦營), 그리고 충청도 청주에는 진남영(鎭南營)을 설치하였다. 청주에 남아 있는 2개의 홍계훈 선정비에 의하면, 그는 1887년 가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면서 청주 병영에 친군영이 설치되자, 건물을 짓고 관군을 모집하여 정예 양병을 양성하였고, 1888년(고종 25) 봄에는 고종이 ‘진남영’이라는 영호(營號)를 직접 하사하였다고 한다.

내용/활동

1894년(고종 31)에 동학농민군이 전국에서 봉기하자 그 토벌에 관군으로 참여하였다. 충청도 공주감영으로 파견된 진남영군 100명 가운데 80명은 10월 3일 전라도 연산과 진잠 등지를 순찰하고 돌아오던 길에, 대전에서 큰 집회를 열고 있는 동학농민군들을 만났다.

이에 그 집회 장소로 가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오히려 농민군은 이들을 포위하였다. 이에 영관 염도희와 대관 이종구는 자결하고, 교장 박춘빈도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하였으며, 농민군에 의해 장졸 73명이 일시에 살해되었다.

조직 현황

최고 책임자는 삼도육군통어사 겸 충청도 병마절도사 청주 목사 친군진남영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휘부에는 병방, 좌우영관, 군사마, 문안, 초관, 대관 등이 있었고, 군의, 초장, 교장, 교사 등이 중간급으로, 그 아래에는 초서, 교서, 규칙십장, 병정, 장부, 후병, 화병, 기찰포교, 아병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사항

1895년(고종 32)에 군제가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모충사실기(慕忠祠實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단행본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국학자료원, 2002)

논문

김양식, 「청주병영의 동학농민군 진압과 모충사」(『동학학보』 43, 동학학회, 2017)
집필자
조재곤(서강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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