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의 문헌 『주례(周禮)』의 두자춘(杜子春) 주(註)에 “질[瓦]로써 변죽[匡]을 삼고 가죽을 메워 면(面)을 삼은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다.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 소박한 토제 악기 만으로도 신을 공경할 수 있다는 의미로 ‘토고’와 북채 ‘궤부(蕢桴)’가 언급되었으며, 북송대에 편찬된 『악서(樂書)』 권115에 주11의 북으로 토고, 와고, 부고(缶鼓)가 수록되었는데 이 중 토고와 와고의 모양은 같다. 중국에서는 토제 울림통에 가죽을 씌운 고대의 토기 유물이 발굴된 바 있고 고대 열공토기(列孔土器)류를 토고로 해석한 연구 등을 참고하면, 토고의 연원을 고대 원시 사회로 소급해 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에 술통 모양의 북과 북채가 소개되었고, 세종대 음악 정비 사업을 주도한 박연은 토고를 국가 의례 중 주10의 제례 아악에 노고 대신 편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바 있으나, 실제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의 악기 항목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편, 조선 후기의 민속 및 무속 관련 기록 중에 무당이 굿하면서 두드리는 북을 토고라 주7, 민간의 세시풍속을 묘사하거나, 농촌의 한가하고 풍요로운 주8을 나타낼 때도 ‘토고’라는 명칭을 사용한 예가 확인된다.
『악서』 및 『세종실록』 「오례(五禮)」에 도설로 소개된 토고는 술통 모양의 북이다. 울림통과 북면으로 구성된 토고는 흙으로 울림통을 빚어 고온에서 구워 굽고, 양면에 가죽을 씌운 형태이다. 『세종실록』 오례 도설에는 별도의 채가 있다. 북통과 북면, 북채의 구체적인 규격은 알기 어렵다. 이밖에 토제장구 및 청자, 분청사기 장구는 흙을 구워 장구의 울림통을 만드는데, 청자 및 분청사기 유물의 공명통은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철화당초문(鐵畫唐草文) 장고의 유리 주12 사진에서 청자 장구통과 가죽을 씌웠던 철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 토고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하는 선농 제례용이었고, 토제 및 도자기 울림통 장구의 용도가 나무통 장구와 용도가 같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또한 민간에서 무속 의례 등에 사용되었다고 한 토고의 형태도 지금으로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 토고는 북채와 함께 그림으로 설명되었고, 노고의 대체용으로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치는 방법도 노고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