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정오동고분군(平壤貞梧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정오동 일대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조사가 되기 시작하였으나 발굴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무덤은 10여 기 정도로 덧널무덤이 대부분이다. 개별 무덤의 성격과 출토 유물은 기본적으로 평양정백동고분군과 비슷한 점이 많다. 특히 덧널 내 피장자의 성별을 구별할 수 있는 복식 유물이 등장하여 성별에 따라 부장품의 구성과 위계가 달라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덧널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의 이행 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 무덤군이다.
평양정오동고분군 중 발굴 조사된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무덤은 10여 기 정도인데, 덧널무덤이 대부분이다.
정오동 1호는 오봉산 동북 능선의 정상부에 자리하며 1967년에 조사되었다. 무덤의 구조는 동혈합장 덧널무덤이다. 같은 무덤구덩이에 피장자를 합장한 묘제라는 의미이다. 무덤구덩이를 굴착한 뒤 귀틀 덧널을 짜 넣고 무덤구덩이 윗면과 그 주변에 진흙을 두껍게 다져 숯을 깐 다음에 봉토를 만들었다.
주검 칸은 평면 형태가 장방형인데 나무 널받침이 있다. 널받침 위에는 2기의 나무널이 동서로 놓여 있다. 부장 칸은 주검 칸의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주검 칸보다 동서로 각각 80㎝씩 더 넓고 50㎝ 정도 깊게 조성되었다.
서관에서는 부식된 천 조각과 감투, 나무 빗, 벽옥(璧玉), 칼집 조각, 은제 반지가 출토되었고 동관에서는 비녀, 유리구슬, 벽옥, 은반지, 팔찌,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부장 칸 내에서는 청동기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사엽좌금구(四葉座金具)와 장식못, 토관(土管) 등도 출토되었는데 ‘촉군서공(蜀郡西工)’ 명을 새긴 칠기 귀모양잔도 출토되었다.
청동기로는 두귀달린 동복(銅鍑)이 있는데, 북방 유목민들의 애호품이었다. 박국경 2면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후한 초기에 유행하던 것이다. ‘원시5년(元始五年)’ 명 귀모양잔도 출토되었다. 귀모양잔과 구리거울의 연대를 고려하건대 후한 초기 즉 서기 1세기 대에 조영된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정오동 2호도 1967년에 발굴된 무덤인데, 1호와 마찬가지로 동혈합장 덧널무덤이다. 무덤구덩이 속 덧널의 크기는 길이 약 300㎝, 너비 약 200㎝, 높이 약 40㎝이다. 바닥에는 벽돌을 깔고 그 위에 나무 각재목을 쌓아서 덧널을 만들었는데, 뚜껑은 남아 있지 않다. 이는 덧널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의 이행 과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덧널 내의 동남쪽에 치우쳐 남북으로 2기의 나무널을 안치하고 서쪽과 북쪽 공간은 부장 칸으로 삼았다. 부장품으로 보아 서관의 피장자는 남자로 추정된다. 서관 내부의 서북쪽 모서리에서는 머리꽂이가 출토되었다. 여자 관인 동쪽 나무널 내부에서는 굵은 털실로 짠 담요가 깔리고, 그 위에서 남색유리제 귀걸이 2점이 출토되었다.
목관 가운데에서는 은제 반지 4점이 출토되었다. 머리카락, 이식 등으로 보아 머리향은 북쪽이다. 나무널 외부의 북쪽에는 서쪽에 치우쳐 회백색호 2점과 그 사이에 소형 회백색 토기 2점, 화분모양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로는 오수전 1매와 연호문경(連弧紋鏡)이 있으며, 축조 연대는 대략 2세기 초로 추정된다.
1968년에 조사된 정오동 3호도 귀틀 덧널무덤으로 동혈 합장무덤이다. 무덤구덩이 바닥을 조정하고 그 위에 나무 각재목 12매를 나란히 깔았으며, 그 둘레에 각재목을 쌓아서 벽을 만들었다. 주검 칸은 동남쪽으로 치우쳐서 널빤지를 세워 만들었다.
피장자의 나무널은 3개였는데, 서관에서는 북쪽에서 비녀 1점과 귀걸이, 그리고 관 중앙의 양쪽에서 은반지 1점씩이 출토되었다. 피장자는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가운데 관에서는 북쪽에 감투 1점이 출토되었다. 동쪽 관에서는 비녀 2점과 머리 부분에서 귀걸이와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허리 부근의 양쪽에서는 은반지가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중앙관이 남성이고 양옆의 피장자는 여성으로 추정된다. 부장품으로는 철장검, 화장곽, 띠고리, 연호문경, 도장, 사엽좌금구에 각종 칠기가 있다. 청동단지와 화분모양토기가 각 1점씩 출토되었고, 석영 혼입계 백색토기 6점 등이 출토되었다. 북쪽의 부장 칸에서 출토된 토기에서는 조개껍질 수십 개가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1세기 후반으로 판단하였다.
정오동 4호도 1968년에 발굴되었는데, 이 역시 동혈합장 덧널무덤이다. 지하식 덧널 내부에는 2기의 나무널을 안치하였다. 서관은 통나무를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윗면을 ‘U’자 모양으로 파낸 것인다. 동관은 서관보다 좁으며 관의 북쪽이 남쪽보다 넓다. 동관은 널재목식 나무널인데 장구 모양의 나무쐐기로 결구시켰다.
서관 북쪽에서는 감투 조각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동관에서는 북쪽에 머리꽂이 4점, 가운데 동쪽 부분에 은제 팔찌 2점과 은제 반지 1점이 출토되었다. 가슴 부위에서는 모직물과 비단천의 부식 흔적이 관찰되었다. 부장 칸은 주검 칸 밖에 만들었는데, 각종 칠기와 귀모양잔들이 출토되었다.
도금한 포수(鋪首: 청동그릇 등의 옆면에 부착하는 고리 일종)와 칠반(漆盤), 화장품통 등도 출토되었다.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과 대형 백색토기 독도 중요한 출토 유물이다. 칠기 중에서 ‘영평14년(永平一四年)’ 명 칠반이 출토되었지만, 백색토기의 상한이 서기 1세기 대로 정해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969년에도 여러 기의 덧널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다. 먼저 정오동 5호가 이 해에 조사된 동혈 합장무덤이다. 덧널은 동서 길이 460㎝, 남북 길이 450㎝의 네모진 형태로 내부는 4개의 칸으로 나누어진다. 서북쪽 공간이 주검 칸이고 나머지는 모두 부장 칸이다.
내부에서는 서관과 동관이 발견되었다. 서관에서는 거울과 장옥류, 칼과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반면 동관에서 거울과 화장품, 장신구가 출토된 것을 보면, 서관은 피장자가 남자이고 동관은 여성이 묻혔음을 알 수 있다. 피장자가 남성인 서관에서는 비녀 1점과 감투 1점, 거울 1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철장검 1점과 단검 1점, 손칼 1점이 출토되었다. 띠고리도 1점 출토되었다.
여성 피장자가 부장된 동관에서는 비녀 1점과 옥구슬 6점, 은제 반지 1점이 출토되었다. 허리춤에서는 청동제 팔찌 1점과 거울 1점이 출토되었다. 토착계 문화 요소가 거의 사라진 단계의 무덤으로 서기 1세기 대로 추정된다.
정오동 6호는 무덤구덩이와 덧널 사이에 기와를 포개어 두 겹으로 채워 넣은 것이 특징적이다. 구조는 동혈합장 덧널무덤인데, 5호와 마찬가지로 주검 칸과 부장 칸을 나누었다. 주검 칸 안에는 나무널 2개가 남북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동관의 북쪽 가장자리에서 비녀 1점과 귀걸이 1점이 출토되었고, 서쪽 측판 근처에서는 은제 반지 4점과 구슬류가 출토되었다. 동관이 여자 관, 서관이 남자 관으로 판단된다.
북쪽에 마련된 부장 칸의 동쪽에서는 짧은목항아리 2점과 화분모양토기 1점이 출토되었고, 서쪽 공간에서는 대형 백색토기 독과 소형 백색토기 2점이 출토되었다. 서북쪽 부장 칸에서는 각종 칠기류가 출토되었고, 북쪽 공간에서는 청동거울인 '장의자손명내행화문경(長宜子孫銘内行花文鏡)'이 출토되었다.
부장 칠기에는 기년명이 다수 확인된다. 건무5년(建武5年: 29년), 건무7년(建武7年: 31년), 건무18년(建武18年: 42년)이 그것인데, 무덤의 조영 연대가 서기 1세기 중반임을 시사한다. 이는 백색토기의 상한이 서기 1세기 대라는 점, 그리고 '장의자손명내행화문경'이 후한경이라는 점과도 부합된다.
정오동 7호도 동혈합장 덧널무덤인데 무덤구덩이와 덧널 사이에 기와를 채운 것이 특징적이다. 남북 길이 320㎝, 동서 너비 310㎝ 정도의 덧널 내부에는 동서로 나무널 2기가 부장되었다.
부장 칸에서는 각종 칠기류와 청동기류가 출토되었는데 동반된 거울은 상방가경사신경(尙方佳鏡四神鏡)이다. 토기류에는 석영 혼입계 백색토기와 니질계 납작바닥항아리에 화분모양토기가 있다. 철기류에는 큰칼과 작은칼이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이 역시 서기 1세기 대의 유물갖춤새이다.
정오동 8호 역시 동혈합장의 덧널무덤이다. 나무 각재목으로 구축하였으며, 내부에는 3개의 나무널을 두었고 북쪽 공간을 부장 칸으로 삼았다. 나무널 가운데 서쪽에 있는 2개의 나무널은 각재목을 깔고 관을 놓았으며, 동쪽 나무널은 바닥에 그대로 놓았다.
중앙관은 통나무를 다듬어 ‘U’자 모양으로 파낸 것이다. 동관에서는 은반지만 출토되었고, 중앙관에서는 은반지와 각종 구슬류가 나왔다. 서관에서는 출토 유물이 없었다. 부장 칸에서는 대형 백색단지 4점과 화분모양단지 2점, 니질계 항아리모양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많은 수의 칠기와 띠고리, 그리고 청동거울 2점이 부장되었다. 거울은 서기전 1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서기 1세기 중반까지 유행하였던 박국경과 서기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대에 유행하였던 반룡경(盤龍鏡)이 확인된다. 나무널이 3개인 것으로 보아 2회의 추가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오동 10호도 1969년에 발굴된 동혈합장 덧널무덤이다. 무덤구덩이 바닥에 강돌을 깔고 그 위에 덧널을 설치한 구조로 무덤구덩이와 덧널 사이에도 강돌을 채워 넣었다. 무덤구덩이 서쪽 벽에는 자갈을 채워 넣은 9m 길이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이곳이 무덤길이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정보이다.
덧널 내부는 주검 칸과 부장 칸으로 나누어진다. 유물은 나무널 내부, 그리고 덧널의 동쪽과 남쪽의 부장 칸에서도 발견된다. 덧널 내부에는 3기의 나무널이 안치되었다. 서관에서 구슬 3점, 가운데 관에서는 띠고리 1점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아 서관은 여자 관, 가운데 관은 남자 피장 관으로 추정되며 머리향은 남향이다. 동관에서는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동쪽 부장 칸에서는 쇠뇌 1점과 장검 1점, 박국경 2점이 출토되었다. 쇠도끼와 재갈, 그리고 마구류도 부장되었다. 남쪽 부장 칸에서는 청동단지 1점, 백색토기 독 5점과 화분모양토기 2점이 발견되었다. 박국경과 백색토기 등으로 보아 무덤의 상한은 서기 1세기 대로 정해진다.
정오동 11호분은 봉분이 만두형(饅頭形)을 이룬다. 각 변이 4m의 원형에 가까운 무덤구덩이의 바닥과 네 벽을 점토로 굳게 다진 다음, 그 안에 덧널을 설치하고 덧널과 무덤구덩이 사이의 틈에는 강돌을 채워 넣었다.
덧널은 한 변의 길이가 3m 정도인 정방형이며 높이는 75㎝ 정도였다. 덧널은 동남쪽 구석에 남북을 긴 축으로 2개가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띠꾸미개만 발견된 서쪽 관이 남자, 은반지, 귀걸이 등이 나온 동쪽의 관이 여자의 관으로 생각된다.
1971년에는 정오동 12호가 발굴되었다. 이 역시 동혈합장의 귀틀덧널무덤인데 덧널의 바깥에 곁덧널을 붙인 형식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왕우묘(王旴墓)와 같은 구조이다. 덧널은 바닥에 각재목을 1벌 깔고 4변에 나무 각재목을 쌓아 올려 구축한 구조이다.
목곽 내부는 칸막이벽을 만들어 동서로 칸을 나누고 서쪽에는 나무널을, 동쪽에는 부장품을 놓았다. 덧널의 북쪽 벽에 붙여서 곁덧널을 만든 구조이다. 주검 칸에는 2개의 목관이 안치되었으며, 서관은 통나무를 네모나게 다듬어 ‘U’자 모양으로 파고 측판 양쪽에 ‘ㄷ’자 모양의 홈을 수직으로 파서 마구리를 위에서 내려 끼웠다. 동관은 통나무관이 아니라 널재목관이다. 유물 부장 공간은 목관 내부, 부장 칸, 그리고 곁 칸이다.
피장자를 수납한 동관에는 은팔찌 2점과 은반지 10점이 출토되었다. 서관에서는 오수전 60여 매와 옥돼지, 홍문마개, 그리고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주연부가 낮고 평평한 것으로 후한 시기 이후로 편년되는 것이다. 부장 칸에서는 내행화문경과 수대경(獸帶鏡)이 출토되었으며, 각종 칠기가 발견되었다. 동남쪽 모서리에서 백색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내행화문경은 서기 1세기 전반2세기 초에 유행하였던 형식이며, 백색토기도 서기 1세기가 상한연대이다. 반면 수대경은 서기 1세기 후반2세기 전반에 걸쳐서 유행한 형식이다. 동반된 와당(瓦當)은 그것보다 시기가 늦은 것인데, 곁 칸이 추가되는 시점, 즉 늦은 시기의 추가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것처럼 정오동에서는 광복 후 많은 귀틀덧널무덤이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귀틀덧널무덤의 구조적 특징과 피장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유물이 확보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기 1세기 대에서 2세기 대에 걸쳐서 조영된 것인데, 추가장이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 귀틀덧널무덤을 구덩식, 즉 위에서 구덩이를 파고 피장자와 부장품을 내려 묻는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정오동 10호에서 덧널 바깥으로 배수로가 발견된 것을 보면, 이들 덧널무덤 중에는 횡으로 무덤길이 만들어진 것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정오동고분군은 평양정백동고분군과 비슷하게 덧널무덤이 중심이 된 낙랑군 시기의 무덤군이다. 제1호는 전형적인 낙랑군 시대의 덧널무덤이고, 제2호는 덧널무덤에서 벽돌무덤으로 이행 과정을 보여 주고 있어서 낙랑군 시대 무덤 변천사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또한, 평양정오동고분군의 발굴을 통해서 덧널 내 피장자의 성별과 부장품의 상관 관계가 있음이 뚜렷하게 밝혀졌다. 기년명과 청동거울, 그리고 상한연대가 알려진 토기류의 출토를 통해 이 시기에 축조된 무덤들의 조영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