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혼춘에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난 후인 1919년 3월 31일에 조직되었다. 혼춘현(琿春縣) 지역 기독교도들의 조직이었던 기독교우회(基督敎友會)의 기반 위에서 결성된 유력한 항일운동단체였다. 러시아 지역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 혼춘지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부의 소재지는 혼춘현 동문 안 박봉식(朴鳳植)의 집이었고, 간부진은 회장 이명순(李明淳), 부회장 박관일(朴觀一), 총무 서윤묵(徐允默), 서기 여남섭(呂南燮) · 오종범(吳宗範), 회계 오현경(吳玄慶), 통신반장 나정화(羅正化), 교제과장 황병길(黃炳吉) 등이었다. 거사 시에 단체의 지휘는 황병길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하였다. 회원 수는 3,000명이었고, 혼춘현의 회원 수는 200명에 달하였다.
1919년 8월 3일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참가한 김규식(金奎植)의 여비를 의연(義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고문」과 「의연금 청구장」을 배포하였다.
1919년 8월 31일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선언한 이후, 혼춘 한민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혼춘 한민회의 활동 목표는 독립전쟁을 위한 무장활동이었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시에 후원을 위해 200여 명의 무장부대를 파견하였다.
1920년 8월 말 당시 간부는 회장 이경호(李京鎬) · 윤동철(尹東喆), 부회장 장학년(張學年), 사령관 최덕준(崔德俊), 군무부장 최경천(崔慶天), 군무부 대대장 최성삼(崔成三) 등이었다. 병력은 부대원 약 250명, 군총 300정, 기관총 3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간도 침공 당시 회장 이경호 · 윤동철, 사령관 최덕준 등은 일본군에 귀순하였다. 최경천, 최성삼 등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여 1921년 7월 추풍(秋風)의 솔밭관 공산당부대에 합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