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남아 있는 홍성 홍주읍성의 성벽 둘레는 약 810m 정도이고, 성안에는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외삼문(外三門)인 홍주아문(洪州衙門),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 여하정(余何亭) 4동의 건물이 현존한다. 처음 읍성이 축조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둘레가 533보 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조선 초 문종 때 충청 전라 경상도 체찰사(體察使)였던 정분(鄭苯)은 각 지역의 읍성을 구별하여 일부는 그대로 사용하고, 일부는 새로운 규식(規式)대로 고쳐 쌓거나 혹은 물려 쌓아 규모를 확대하는 등의 차이를 두기를 청하였다. 그 중 홍성 홍주읍성은 충청도의 비인, 남포, 보령, 해미, 당진, 면천 읍성과 더불어 그대로 사용하도록 한 읍성의 하나였다. 당시 실록의 기록에는 둘레 4,856척, 높이 11척, 여장(女墻) 높이 2척, 적대(敵臺) 24곳 중 18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고, 성문 4곳 중 1곳에는 옹성(甕城)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성 안에 우물 2곳이 있고, 성 안에는 작은 천(川)이 흐르고, 해자(垓子)는 아직 파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홍주성의 규모는 대체로 큰 변화가 없었는데,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4,915척 높이 15척이라 하고 세 개의 우물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높이를 약간 높이는 정도의 수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영조 때의 기록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성의 둘레와 높이가 각각 주척으로 5,850척, 16척이라 하고, 3칸 규모의 동문과 서문 외에 누각이 없는 북문을 언급하면서 남문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 둘레를 조금 넓히되 남문은 폐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더불어 성가퀴(堞) 386개소와 7개의 곡성(曲城)이 설치되었고, 읍성 내 경사당(景士堂)의 서쪽으로 길이 15척, 너비 10척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들어 홍성 홍주읍성은 몇 차례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으며, 가장 큰 변화는 1867년 홍주 목사로 부임한 한응필(韓應弼)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1870년 2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공사에는 한응필의 연봉금 3천 냥과 결세부가금 3만 5천 냥 등 총 6만 3천 냥을 투입하여 성벽 567척을 새로 쌓고 615개의 성가퀴(堞)를 설치하는 외에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서문인 경의문(景義門), 북문인 망화문(望華門)과 문루를 신축하였다. 당시 공사는 이와 같이 읍성을 수축하는 외에도 객사 42칸을 보수하고, 관아 224칸을 신축하는 등의 대규모 정비 사업이었다.
1907년 내각령 1호가 발효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 읍성 안을 흐르는 천(川)의 북쪽으로 동문과 서문 및 북문을 연결하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그 폭을 넓히기 시작하였고, 성 내외를 연결하는 도로가 신설되기 시작하면서 읍성의 북쪽 지역 성벽이 철거되고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지목과 지번이 부여되지 않았던 성벽이 토지대장에 기록되면서 일본인들이 소유하였던 성벽을 중심으로 직교형 가로망으로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성벽을 철거하게 되고, 이로써 읍성의 물리적 공간을 한정하였던 북쪽의 성벽이 점차 사라지고 성벽 밖으로부터 안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72년에 홍성 홍주읍성이 사적으로 지정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보수 정비가 시작되었다. 1975년에 동문인 조양문을 완전 해체 ·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2006년부터 시작한 학술 조사 및 발굴 조사를 통하여 성벽의 훼철 구간과 규모를 확인한 후, 이를 토대로 2013년 남문인 홍화문과 문루를 복원하였다. 또한 2008년 북문지 발굴 조사와 2015년 수구지 발굴 조사를 토대로 성벽을 정비함과 동시에 2020년에 옹성을 갖춘 북문을 복원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홍성 홍주읍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남북 방향이 길고 동서의 폭이 좁은 형태로 남북의 경우 북쪽이 넓고 남쪽으로 가면서 점차 좁아져 남문 쪽에 이르면 회절점이 형성되어 쐐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적으로는 행주형(行舟形)으로 분류된다. 읍의 서쪽 백월산으로 흘러내리는 두 갈래 물길인 월계천과 홍성천이 읍 전체를 감싸 돌며 합쳐져 동쪽으로 흘러 자연 해자를 이루고, 읍성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들 하천을 연결하는 소하천이 성을 가로지르며 금천(禁川)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읍성 내 도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읍성의 도로가 ‘T’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하여 홍주성은 ‘ㅗ’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공공건물인 객사가 읍성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남쪽 아래로 두 개의 동헌이 동서로 배치되었다. 서쪽에는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안회당(安懷堂)을 포함한 동헌이, 동쪽에는 군사 목적의 진영(鎭營) 동헌이 배치되어 균형을 이루었다.
현재 발굴 조사를 토대로 읍성의 둘레와 높이를 실측한 결과는 각각 1,528m, 4.5m 정도로 조선 전기 및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 비하여 그 규모가 큰 편인데, 이는 19세기 말 대대적인 수축을 통하여 읍성의 규모가 확대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쌓은 시기와 구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성벽 밑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작은 돌을 사용하되 장방형으로 돌을 가공하여 통줄눈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으며, 85° 정도 안으로 기울여 쌓았다. 성벽 내부는 규격이 같은 돌로 뒤채움을 하여 흙이 유입되어 토압이 증가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성벽 몸체 위에는 여장(女墻)을 설치하였고, 읍성의 성벽을 따라 치(雉)를 설치하여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고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홍성 홍주읍성은 처음 축조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서 조선 초기에 이미 잔존하고 있던 성으로, 기존에 구축되었던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지에 위치한 읍성으로 북쪽보다 남쪽이 높은 지형을 잘 이용하여 백월산에서부터 흐르는 하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읍성으로의 주 출입은 동문을 통하도록 하여 도로와 읍성 안 공간을 구획하였다. 읍성의 전체적인 공간 구성은 다른 읍성과 달리 남쪽을 비우고 북쪽에 민가를 배치하였지만 객사를 포함한 주요 공해(公廨) 건물은 남향하도록 하여 풍수와 기능을 동시에 해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밖에 시간의 켜에 따라 다양한 석축 쌓기 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것도 홍주읍성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