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구 ()

영도구청
영도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부산광역시 남부의 단일 도서로 구성된 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부산광역시 남부의 단일 도서로 구성된 구.
개관

동쪽으로는 부산만에, 서쪽으로는 남항에, 남쪽으로는 남해에 연한다. 북쪽으로는 중구와 연결되어 있다. 동경 129°06'~129°21', 북위 35°00'~35°05'에 위치한다. 면적은 14.15㎢이고, 인구는 12만 938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1개 행정동(21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에 있다.

자연환경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단일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으로 부산만이 서쪽으로는 남항이 연해 있다. 섬 중앙에 주봉인 봉래산(蓬來山, 395m)이 솟아 있으며, 동삼동 일대에 구릉성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섬 말단부의 두각지에는 경사가 급한 해식애가 형성되어 있고, 이곳에 태종대가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계류천들이 바다로 유입하며 유로는 짧다. 이들 사이에 많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평지는 섬의 북동부에 발달하고 남동부는 비교적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북항과 남항에 연한 평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매축된 매립지이다.

봉래동에 소재한 봉래산(蓬萊山, 394.6m)은 영도의 주봉을 이루는 산으로 산 전체가 원추형을 나타내고 있다. 고갈산 또는 고깔산으로도 불리는데, 한자의 ‘고갈산(沽渴山)’, ‘고갈산(枯渴山)’은 각기 목이 마른산, 마른 도마뱀의 산, 말라서 없어지는 산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봉래산의 다른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사면은 가파른 편이고, 특히 남쪽사면은 급경사로 바다에 거의 수직으로 돌입하고 있다. 산기슭에는 기계적 풍화작용에 의해 파쇄된 암석의 파편들이 애추를 형성하고 있다. 봉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조봉(遭逢)이라 하고 그 다음의 봉우리를 자봉(子峰), 그 아래의 것을 손봉(孫峰)으로 부르고 있다. 봉래산이란 동쪽바다 한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살고 있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동삼동에 위치한 태종산(太宗山, 197.5m)은 태종대 북쪽에 있는 산이다. 일명 묘방산이라고도 한다. 비교적 험준하고 사면은 급하여 100m에 이르는 해식애에 이어진다. 산의 대부분은 태종대의 유원지로 이용되고 있다. 청학동에 소재한 농청산은 영도의 주봉인 봉래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나온 산등성이의 구릉성산지이다. 봉래동의 소봉산은 봉래산 능선에 있는 봉우리의 하나로 봉래산의 주봉인 조봉과 그 다음의 봉우리인 자봉의 아래에 있는 산으로 일반적으로 손봉이라도 부르고 있다.

동삼동 상리마을에는 탱자나무골이 있다. 봉래산 남동쪽 산록에서 발원하는 소하천에 의해 형성된 계곡으로 탱자나무가 많은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영선동의 한진골은 봉래산 남서 산록에서 발원하는 소하천의 계곡으로 웅짓골이라고도 불린다.

이들 산지사이에 교통로로 이용된 고개가 형성되어 있다. 봉래동에 소재한 아리랑고개는 봉래동과 청학동을 경계 짓는 고개로서 지금의 봉래산 산복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의 교통로 역할을 담당했던 고개이다. 고개 지명은 산림이 울창하고 험하며 길이 구불구불하여 울면서 넘어가야만 했던 데서 유래되었다. 청학동에 소재한 복징어고개는 청학동에서 동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해발 50~70m에 있는 이 고개는 현재 확장 포장되어 영도의 간선도로인 태종로로 바뀌었다. 영선동에 소재한 영선고개는 영선 2동에서 신선 3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봉래산의 남서쪽 산록을 따라 오늘날의 제2송도로 연결되는 유일한 길이었다. 현재 영선로터리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가 되어 있다.

봉래산에서 발원한 여러 소하천들이 개석 작용을 하면서 여러 계곡을 형성하며 바다로 유입된다. 유로가 짧아 퇴적지형의 발달은 미약하다.

북동부의 매립지역을 제외하고 해안지역은 대부분 급경사의 암석해안을 이루고 있으며, 태종대의 일부 지역에서는 자갈해안이 나타난다. 주요 도서로는 조도(朝島)와 생도(生島)가 있다. 조도는 일명 아치섬·앗치섬 또는 동백섬이라고도 불리며 영도와는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다. 부산만 북항의 입구에 있는 해발 141m의 첨봉으로 된 섬으로 한국해양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과 서남쪽 해안을 제외하고 급준한 사면으로 되어 있어 선박의 접안이 불가능하다. 지명은 부산에서는 아침이 가장 먼저 시작된 데서 유래되었다. 이외에도 와치섬으로 불리기도 하며, 『동래부지』(1740)에는 고지도(古智島) 또는 동백도(冬柏島)로 기록되어 있다. 1947년 도로의 개설로 연육되었다. 생도는 태종대 남쪽에 있는 무인도로서 동이 또는 주전자처럼 생겼다 하여 동이섬·주전자섬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우리나라 지도 작성의 기점이 되는 삼각점이 있다.

이곳 해안지역에는 과거에 많은 포구가 발달하였다. 남항동의 포구는 과거 바다였으나 지금은 해안매립을 통해서 이루어진 매축지이다. 옛지명은 석말추라 했으며, 여름이면 태풍과 해일이 있을 때마다 상습적인 피해를 입었다. 일제강점기 매립으로 만들어진 어항으로 오늘날에는 어선 정박과 수리, 급수를 받기도 하고 태풍이 오면 연근해 어선들의 대피장소이기도 하다.

대교동 나릿가포구는 1934년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전까지 지금의 대교동과 봉래 1동 일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바닷가 포구의 옛 지명이다. 육지로 왕래하던 도선장이 있었고, 이곳이 나룻배를 타고 오르내리는 곳이라 하여 나릿가포구로 불렸다. 대평동포구는 대풍포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대풍포란 어선들이 풍랑을 피하기 위해 잠시 피항하는 포구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본래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영도에서 남포동쪽으로 뻗어 나온 하나의 큰 사주로서, 모래섬에 지나지 않았으나 1900년 초 일본의 어선들이 몰려들면서 어선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청학동에 소재한 복징포는 복징어고개 아래에 있는 포구이다. 지명은 이곳에서 복징어(복어)가 많이 잡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도서로 되어 있어 기후는 전형적인 온대해양성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에는 태평양고기압의 영향으로 고온, 습윤한 기후를 나타내고 내륙보다 기온이 낮다. 겨울철에는 기온이 상대적으로 높아 연교차가 비교적 적다. 연평균강수량은 1386.5㎜로 월평균 115.5㎜이다. 연평균기온은 14.9℃이다.

역사

영도는 해운대구 좌동의 구석기 유적과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인 동삼동, 아치섬[朝島], 영선동(瀛仙洞) 등의 패총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석기 등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 시기는 대략 6000~5000년 전의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이로 보아 영도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석기 문화인들은 3000년 전부터 청동기문화를 수용하였는데, 영도 지역에는 아치섬의 조개더미에서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영도는 삼한시대에 변진 12국 중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산 지역은 삼국시대에 일찍이 신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영도 지역도 신라의 지배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도 태종대의 지명 기원이 신라왕인 태종무열왕과 관련이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에는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이곳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말을 선물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한때 후백제의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동삼동에 목장이 있었다.

영도에 접하고 있는 부산포는 조선시대 대일방어상 군사의 요지였다. 영도는 임진왜란 이후 무인도로 바뀌었다. 이는 임진왜란 후 왜적의 재침이 두려워 주민들이 섬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데다가, 왜관의 개설과 더불어 왜관과 가까워 사민책(徙民策)이 적극 장려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업 등의 이유로 소수의 주민들이 거주하였지만 전체가 100호 미만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에 있던 왜관이 폐쇄되었으나 다시 일본의 요청에 의해 왜관이 설치되면서 조선 정부는 절영도에 왜관을 설치하였다. 1601년부터 이곳에 있던 임시 왜관은 1609년 두모포왜관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대일교역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 수군진영인 절영도첨사영이 1881년에 설치되어 갑오경장 뒤인 1895년까지 15년 동안 존속했다. 지금의 영도 동삼동 중리가 그 자리이다. 당시 부산포 주위에는 부산진·두모포진·개운포진·서평포진·다대포진 등이 있었는데 개운포진과 서평포진을 없애고 절영도진을 설정한 것이었다. 일본이 개항 이후 영도의 삼림자원을 요구하면서 조선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절영도에 있던 국마장의 말을 모지포(毛知浦: 지금의 서구 암남동)로 옮기고 포이포진(包伊浦鎭: 寧海)·개운포진(開雲浦鎭: 蔚山)·서평포진(西平浦鎭: 오늘날의 사하구 구평동에)을 없애는 대신 그 3진의 수군 장비를 통합하여 절영도진을 설진했다.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중앙동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이와 인접하였던 영도도 매립 등을 통해 급속한 지역변화를 겪게 되었다. 지금의 남항동과 대교동 일대에 1916년부터 1926년 6월까지 당시 석말추 일대를 매립하여 근대적인 어업항이 되었다. 대평동 일대도 비슷한 시기에 매립되었고, 이후 1934년 준공된 영도대교의 가설로 영도는 부산시가지와 인접한 지역이 되었다.

광복 이후 1951년 영도출장소가 설치되고 1957년 구제 실시에 따라 영도구로 승격되었다. 이후 해외 동포가 귀환하고 한국전쟁 중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부산 지역 중 특히 영도 일대의 산록에 취락이 집중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산기슭에 주거지구가 형성되었고, 당시에는 가옥의 규모가 작고 무질서하게 배치된 불량주택지구가 산록을 따라 밀집되었다. 법정동으로 대교동 1·2가(大橋洞 一·二街)·대평동 1·2가(大平洞 一·二街)·남항동 1·2·3가(南港洞 一·二·三街)·영선동 1·2·3·4가(瀛仙洞 一·二·三·四街)·신선동 1·2·3가(新仙洞 一·二·三街)·봉래동 1·2·3·4·5가(蓬萊洞 一·二·三·四·五街)·청학동(靑鶴洞)·동삼동(東三洞) 등 21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신선동에는 영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복천사(福泉寺)가 있다. 고려 말에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사찰 지명은 계곡으로 흐르는 물맛이 좋아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찰은 1978년이 되어서야 낙후된 경내를 일으켜 명부전, 칠성각, 산신각을 세우고 1990년에 약사전, 종각, 설법전을 세웠다.

동삼동에는 구명사(救命寺)가 있다. 원래 지금의 태종대 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였다. 자살바위 옆에 있어 자살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천도하는 한편 오뇌에 차서 그곳으로 오는 사람을 위무하여 극한에 처한 생각을 되돌리게 하거나 불도에 귀의케 했다. 자살바위 옆에 있는 구명사가 그러한 중생구제를 하였는데 그러한 구제를 입어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자살바위 자리에 전망대를 구축하게 되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봉래동에는 과거 이곳에 소재하였던 목장터로 고리장터가 있다. 조선시대 당시 절영도는 국마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나는 말을 절영마(絶影馬)라 했다. 이 영도의 국마장으로는 1년에 한번 또는 두번 나라(서울)에서 목자(牧子)가 내려와서 말을 검사하여 쓸만한 말에는 낙인(烙印)을 찍었다. 낙인이 찍힌 말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징발되었다. 그렇게 말을 검사하는 곳을 고리장(環場)이라 했다. 둘레에 둥글게 고리 모양 말목을 쳐서 그 안에 말을 가두어 넣어 검사를 할 수 있게 한 장소였다. 영도에 있었던 고리장은 신선동과 봉래동의 경계지역으로 오늘날의 봉래동로타리 부근이었다. 동삼동에는 석성터가 남아 있었다. 동삼초등학교 동북쪽 산꼭대기에 있었던 성터로 장방형으로 돌로 쌓여 있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았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쌓은 성이었다는 설과 말과 관계된 목마성이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는 성터의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다. 동삼동 입구의 선암(仙岩)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다.

영도는 조엄(趙曮)에 의해 1763년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처음 전래된 곳이다. 조엄은 1757년 동래부사에 재임하여 1758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대마도(對馬島)에 머물 때 그곳에서 재배되고 있는 고구마를 보게 되었다. 이후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다시 고구마 재배법을 소상히 익힌 뒤 종묘를 가지고 와서 옛날 부사로 있었던 동래의 영도와 경상도관찰사로 있었던 연고지인 거제도에서 재배케 했다. 조엄은 1764년의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에게 종묘법을 가르쳐주었고 재배는 성공하였다. 그때 강필리 부사는 고구마재배법을 쓴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하였다. 당시 전래지는 지금의 청학동 바닷가에 있던 조내기라 불린 마을로 전해진다.

남항동에는 ‘한국 근대조선 발상 유적지’가 있다. 그리고 지금 대평초등학교 교정에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조선소가 설립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1989년에 건립되었다. 비록 초기에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설립된 목선 조선소였지만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술을 익힐수 있는 근원이 된 조선소였다. 그리고 여기 있는 비석은 과거 조선관계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조직된 단체인 반류회(伴流會) 회원 37명이 뜻을 모아 세웠다.

대교동에는 영도대교기념비가 있다. 도개식 영도대교가 개통된 것은 1934년 11월이었다. 그 후 교통 문제뿐만 아니라 영도로 가는 상수도관을 영도대교에 의지해서 가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1966년 9월 도개교가 폐쇄되었다. 도개교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1991년 영도대교 다리목에 화강석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남항동에는 전차종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영도에 지상전차가 개통된 것은 영도대교가 가설된 다음 해인 1935년 2월이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자동차 운행이 많아지고 도로 한가운데로 전차가 다녀 차량교통이 원활하지 못하자 교통사고가 빈발하였다. 이에 1968년 전차운행을 폐지하고 철거하였으며, 1991년 영도 전차종점에 기념비를 세웠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7개교와 한국해양대학교·고신대학교 및 국립수산기술훈련소·한국어업기술훈련소 등 수산 계통의 교육기관이 많다. 한국해양대학교는 1945년 경상남도 진해에서 교통부 산하 고등상선학교로 출발하여, 1947년 인천해양대학과 병합해 국립해양대학으로 개칭되었다가, 1956년에 한국해양대학으로 바뀌었다. 현 위치인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로 727로 지난 1974년에 옮겨왔으며, 1972년 3월 1일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해양·해사 관련분야의 학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대학이다. 동삼동에 소재한 고신대학교는 1946년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가 옥고를 치른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개교하였다. 그 후 이 대학은 고려신학대학, 고신대학 그리고 고신대학교로 교명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송도와 함께 2곳에 캠퍼스가 있으며 이중 영도 캠퍼스에는 신학부와 자연과학부가 있다.

남항동에는 영도구도서관이 있다. 구 대양중학교 건물을 매입하여 건물의 개·보수를 통하여 1996년 7월 1일 부산광역시 영도구도서관으로 개관하였다. 영도구도서관은 시립도서관과는 달리 영도구청 관할도서관이다. 도서 자료의 확충 및 열람 서비스뿐만 아니라, 독서교실 운영, 독서 인구의 저변확대, 시청각·서예교실 운영으로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민속

육지와 격리되어 있는 단일 도서로 되어 있어 민속 풍습이 많이 남아 있다. 과거 마을마다 해신당과 산신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일부 마을에서만 남아 있다. 동삼동에는 당산 할배당과 할매당이 마을의 서쪽 산중턱에 있으며 이외에 상구룡 제당과 용화사 경내에 위치한 조동당산이 있다. 신선동에는 호국관음사 뒤 계곡에 산제당과 아씨당이 있다. 청학동에는 청학초등학교 맞은편에 학배당과 조내기당산인 할매당산이 남아 있다.

설화·민요

‘주전자섬의 금기’는 태종대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섬을 유분도(鍮盆島)라고도 하는데, 이 섬에서 고기를 낚다가 대변을 보면 안 되며 남녀의 정을 통해도 안 되고 또 불을 피워도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동삼동의 어떤 어부가 그것을 미신이라 여겨 겨울에 불을 놓았다가 한마리의 고기도 못 잡았을 뿐더러 그날 밤 섬 전체가 불덩이가 되는 꿈을 꾼 뒤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산업·교통

농업은 동삼동에서 소규모로 행해진다. 과거 이곳에는 어업이 성하였다. 청학동 앞바다에 있던 광암어장은 청학 2동사무소 일대의 옛 지명인 넓섬바위에서 지명이 유래하였으며 이곳에 있던 어장을 이른다. 남항동의 석말추어장은 지금의 남항동 부근의 지명인 자갈만대이 일대이다. 봉래산 남서 산록 끝에서 파도의 운반·퇴적 작용으로 형성된 거대한 자갈 해안이었고, 앞바다에는 청어의 중요 어장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봉래동의 매강추어장은 지금의 한진중공업 일대의 앞 바다에 자리 잡고 있었던 어장의 옛 지명이다. ‘매강추’ 지명은 봉래동과 청학동 사이의 얕은 여울바다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매립에 의해 조선공업지대로 바뀌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이 매립되기 전가지만 해도 이 일대의 바다는 얕은데다가 너비가 좁아 조류가 세차게 흘렀고 이 때문에 이곳을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여울이라는 뜻으로 매강추라 불렀다고 한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데다 창조류와 낙조류도 강하게 흐르고 있어 이 일대의 바다는 각종 어족 특히 멸치와 청어가 많이 몰려드는 좋은 어장의 하나로 이름나 있었다.

1931년 북서쪽 바다를 매립해 형성된 대평동에는 조선소와 선망·선구상회, 철공소·냉동공장 등이 있다. 봉래동에는 각종 어망공장과 보세창고가 있다. 업무지구는 부산대교와 인접한 남항동과 대교동에 집중되어 있다. 남항동에는 국립수산진흥원·국립수산기술훈련소·어업기술훈련소 등의 수산업 관계기관 및 교육기관이 많다. 대교동에는 행정기관 및 대한무역진흥공사 부산사무소 등이 있어 행정업무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조선시대 영도와 육지와의 교통은 도선을 이용하였으며 이때 나루터가 있던 곳이 지금의 대평동 도선장이다. 일제강점기 영도다리가 놓이기 이전부터 영도와 육지인 중구 남포동 자갈치시장 사이를 소형 선박으로 왕래하는 유일한 해상교통의 기착지였다. 본래 영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교통로인 나룻배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장 오래된 곳은 개항된 지 14년 후인 1890년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용미산(지금의 부산시청 자리)의 남쪽 기슭과 영도의 봉래동 갯가 사이의 나룻배로 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다음으로 등장한 것은 1893년 자갈치시장과 영도 대평동을 잇는 일본인 전용의 나룻배였다. 그런데 용미산 산기슭과 영도 봉래동 사이의 나룻배는 1934년 11월 영도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폐쇄되었다. 지금 육지와의 교통은 부산대교·영도대교로 북서쪽의 중구와 연결되며 부산항의 관문 및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 섬내를 연결하는 도로로는 절영로와 태종로가 있다. 태종로는 중앙동의 시청 앞에서 태종대 공원 입구까지의 8.65㎞거리를 말한다. 1972년 청학동과 동삼동 사이의 길이 개통되고 1973년에는 순환도로가 완성되어 태종로와 이어지게 되었다. 절영로는 부산 남항을 끼고 영도 남쪽 바닷가를 굽어보며 지나는 큰길이다. 영도의 대교파출소 앞에서 동삼동사무소 앞까지의 5.6㎞거리가 된다. 이 길은 1960년대 5·16군사쿠데타 이후 생활보호자를 위한 취로사업으로 도로확장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정부의 지원금으로 사업이 마무리되어 태종로와 함께 영도의 대표적인 관광도로가 되었다.

관광

도서로서의 위치와 지형 조건으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태종대는 동남쪽 말단부의 암석해안지대로, 『동래부지』(1740)에 신라 태종무열왕이 활을 쏜 곳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우거진 숲·망부석·자살바위·신선바위·병풍바위 등의 해식애·해식대·시스택(seastak),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관광자원과 일주도로, 유람선·휴게소·위락시설 등의 관광기반시설이 결합되어 부산의 대표적인 임해 관광위락지역이 되었다. 태종대에는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으며 인근에 모자상이 있다. 이곳에 있는 등대는 1906년 12월 1일에 설정 점등되었다. 동삼동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노천 생선횟집이 많고, 특히 태종대 입구의 하리는 해상유람의 기점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생도 주위는 회유성 어류의 길목이 되어 낚시터로 이용되고 있다.

재래시장으로는 남항시장 등이 있으며 주로 어류과 일상잡화 등을 취급한다. 영도에서 자갈해안이 발달한 곳에서는 횟집이 분포한다.

영도의 태종대공원은 파도의 침식으로 형성된 100m에 이르는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있어 울창한 수림과 굽이치는 창파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1969년에 교통부에서 관광지로 지정하였다. 1973년 10월에는 태종대 유원지 관리사업소를 설치하고, 1974년에는 4.3㎞의 해안 일주도로가 완공되었으며, 일주도로 남쪽으로 전망대가 설치되는 것과 함께 2㎞에 이르는 산책로가 완성되었다. 이 공원에는 해변에 자생하는 난대계 상록활엽수와 해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계절을 따라 찾아드는 철새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동(洞)
  1. 남항동

영도구의 북서쪽에 위치한 동으로 옛 이름은 석말추(石枺楸)였다. 이 지명은 앞바다에 큰돌이 있었는데 썰물 때는 돌끝[石枺]이 조금 보였다가, 밀물 때는 보이지 않은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1885년 절영도 첨사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행정 지명을 지을 때 동해(東海)는 본래 신선(神仙)이 사는 곳이라 하여 신선과 연관된 이름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 이때 석말추는 ‘신선이 사는 시내가 있다.’는 뜻의 영계(瀛溪)로 바뀌어지기도 하였다. 1931년 영도대교 개통시 인근 바다를 매립한 뒤 일본식 동명으로 석견정(汐見町)이라 불리었다. 석견이란 ‘썰물을 본다’라는 뜻인데, 이곳은 남항의 바닷가이므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광복 후 동명 개칭 작업을 할 때 이곳에 어업기지 및 수산 관계기관이 운집해 있고 부산의 남항을 끼고 있다 하여 남항동 1·2·3가로 바뀌었다. 1961년 남항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대교동

영도구의 북서쪽에 위치한 동으로 지명은 영도대교와 인접한 것에 유래하였다. 영도대교 가설시에 대교동은 거의 매축지로 형성되었다. 대교동은 1914년에 북빈정(北賓町)이라 불리었다. 북빈정은 지금의 자갈치 부근을 남빈(南賓)이라 하였는데 반하여 북쪽 바닷가의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1934년 영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영도대교의 이름을 따서 대교통(大橋通)이라 불리었으며 광복 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대교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청학동으로 구청이 이전되기 전까지만 해도 구청, 경찰서 등의 많은 관공서가 운집하고 있어 오랫동안 영도의 행정 중심지였다. 행정동인 남항동의 관할 하에 있다.

  1. 대평동

영도구의 북서쪽에 위치한 동으로 남항으로 돌출되어 있다. 원래 풍발포(風發浦)라 불리었다. 풍발은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나는 뜻의 지세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원래 영도에서도 떨어져 있는 섬이었다. 남항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현 대동대교 맨션이 위치하고 있는 14통을 비롯하여 15~17통 일대는 바다였고, 일제시대에 영도 서북쪽의 바다를 매립해 갑정(岬町)이라 하였다. 갑(岬)은 산허리 또는 바다로 뾰족하게 내민 땅이란 뜻으로 매축되기 전의 지형적 특색에서 이름지어졌던 것이다. 일본 어선단이 대평동을 정박지 삼아 이곳 대풍포를 근거지로 많은 선박이 운집하였다. 이에 절영도란 이름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인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풍(風)을 평(平)으로 바꿔서 대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전에 이곳은 남포동 사이를 도선이 운행되었던 유명한 곳이다. 이 도선장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행정동인 남항동의 관할 하에 있다.

  1. 동삼동

영도구의 중부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상리(上里)·중리(中里)·하리(下里) 3곳의 마을이 있었으며 영도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삼동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 관내에 동삼동 패총, 아치섬 패총 등이 있어 영도에서 가장 먼저 취락이 형성된 지역이다. 임진왜란 후 영도가 빈 섬으로 남겨져 있을 때에 동삼동 지역은 어장으로 어민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진(鎭)의 설치 이전에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동삼 상리는 웃서발[上西跋]이라 하고 동삼 하리는 아랫서발[下西跋]이라 하여 어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삼동 중리는 검정방우[黙岩]라 불렀으며, 옛 진이 설치되었던 부근은 동지(東地)라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지형지세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아랫서발에는 팔준마(八駿馬)가 물을 먹었다는 감연(甘淵)·감지(甘地) 또는 감정(甘井, 甘訂)이라 부르는 못이 있어 당시 목마른 말들이 이곳에서 목을 적셔 갈증을 면하였던 곳으로 목마장이었던 영도에서 가장 신성한 연지(蓮池)로 손꼽혔다. 영도에 목마장이 생김에 따라 첨사(僉使) 임익준任翊準)은 웃서발을 상리로 개칭하였다. 이때 중리는 영도의 봉래산으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이중 진소(鎭所)가 있던 동지는 바로 신선의 거처라고 하여 영주(瀛州)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동삼동은 광무 7년(1903) 행정개편 때 사중면(沙中面) 상구룡동(上驅龍洞)·하구룡동(下驅龍洞)이었다. 전자는 오늘날 동삼 1동 일대에 상리로 후자는 동삼 2동 일대 하리에 해당된다. 1931년 동명 정리 때에는 동산정(東山町)이라 불리었으며 광복 후 1947년 일본식 동명 개정 때에 오늘의 명칭으로 바뀌어 불려졌다가 1985년에 동삼 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봉래동

동래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섬의 가운데 위치한 봉래산에서 유래되었다. 봉래산에는 조봉(租峯), 자봉(子峯), 손봉(孫峯)의 세 봉우리가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때 세칭 고갈산(沽渴山) 또는 고갈산(枯渴山)이라 불렀다. 절영도 진(鎭)의 첨사(僉使)로 가장 오래 재직한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고쳐 지을 때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산 이름을 봉래산(蓬萊山)이라 명명하였다. 봉래동과 청학동 경계에는 아리랑고개가 있어, 지금의 봉래산 산복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유일한 통로로 많은 애환을 남긴 고갯길이었다. 일제 때는 부산항을 마주 한다하여 항정(港町) 1·2·3·4정목이라 불리었으며 광복 후 일본식 동명 개정 때 봉래 1·2·3·4동이 되었다. 지금은 봉래 1·3·4동이 있다.

  1. 신선동

영도구의 북서부 내륙에 위치한 동이다. 신선동에는 오랫동안 많은 전설이 얽힌 영도의 수호신을 모시는 세칭 산제당, 하씨당(河氏堂)이라는 당집이 있었다. 봄, 가을 두 번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당집의 주인이 여신선(女神仙)인 까닭에 1885년 첨사(僉使) 임익준(任翊準)이 새로운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신선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 당집은 영도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옥성학교(玉成學敎) 시절까지 울창한 산림사이에 있었으나 학교 부지 확장에 따라 훼손되었다. 하씨당은 원래 아씨당에서 연유된 것으로 풀이되는데 여자를 주신으로 모신 것이었다. 일제시대에는 북서쪽의 개펄을 매립하여 산수정(山手町)이라 불렀으나 광복 후 일본식 동명 개정 때 신선동이라 하였고 이후 신선 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영선동

영도구의 북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영선동은 영도에서 제일 먼저 동 지명이 형성된 곳이다. 대한제국 건양원년(1896)에 행정체계가 전국 8도에서 13도로 개편할 때 동래부 사하면(沙下面) 영선리란 행정동명이 처음 제정되었다. 당시 영선리의 영역은 현 봉래동, 신선동, 남항동, 대평동 일대로 옛 이름은 나릿가였다. 현재의 부산시청 자리인 용미산(龍尾山) 아래에서 영도로 향하는 배를 타면 내리는 나루가 바로 이곳이어서 나루라는 데서 연유하여 나릿가라고도 불리었다. 일제강점기 들어 이곳이 일본 쪽을 보기에 알맞은 곳이라 하여 어영정(御影町) 1·2·3·4정목이라 불렸으며 광복 이후 일본식 동명 개정 때 다시 영선동이란 이름을 찾았다. 인구 증가로 영선 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 청학동

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선사시대의 조개무지가 있어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지명은 이곳에 숲이 울창하였고,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해운대에서 영도를 보면 마치 학이 남쪽으로 나르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하여 지명이 유래되었고 전해진다. 행정동명이 제정되기 전에는 현 청학시장과 부산은행 청학동지점 바닷가 일원을 조내기라 불렀다. 이 일대는 어장으로 많은 생선이 잡혔는데, 특히 멸치가 많이 잡혔다. 어장의 개발에 따라 뚜껍바구[蟾岩], 넉섬방우, 덤머들 등의 해안 지명이 생겨나고, 이후 인가가 들어섬에 따라 조내기라는 지명도 얻어졌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고구마가 처음 전래된 곳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청산정(靑山町)이라 하였다가, 광복 후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다시 청학동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 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1970년 청학 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통계연보』(부산광역시 영도구, 2008)
『부산통계연보』(부산광역시, 2005)
『구정백서』(부산광역시 영도구, 2005)
『부산교육통계연보』(부산광역시교육청, 2005)
『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 2005)
『한국지리지 -경상도편』(건설부국립지리원, 2005)
『부산의 민속문화』(세종출판사, 2003)
『부산민요집성』(세종출판사, 2002)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2)
『부산지명총람』(부산광역시, 1995-2002)
『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1993)
부산광역시 영도구(www.yeongdo.go.kr)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