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忠惠王)은 충숙왕(忠肅王)의 제3 왕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를 범하여 기철(奇轍)을 비롯한 이의 상소로 폐위되었고 원(元)나라에서 대경(大卿)과 타치[朶赤] 등을 보내어 그를 잡아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12월에 그는 원나라 순제(順帝)에 의해 원의 도읍지인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산동성(山東省)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던 도중 1344년(충혜왕 복위 5) 1월 병자일에 악양현(岳陽縣)에서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6월 계유일에 고려로 그의 시신이 운구(運柩)되었다. 충목왕(忠穆王)이 그해 8월 경신일에 왕실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능호를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능(陵)에 장사를 지낸 후 그의 신주(神主)는 24개월간 혼전(魂殿)에 존속하였다가 1346년(충목왕 2) 5월 을유일에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였다. 충혜왕과 그의 왕비였던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진전사원(眞殿寺院)은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토성리 묵사동 광덕산 아래에 있는 신효사(神孝寺)이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의 관리를 위해 제릉서(諸陵署)라는 담당 관서에 관원을 두었고, 왕릉은 위숙군(圍宿軍)이 지키게 하였으므로 영릉에도 위숙군을 배치하였다. 이후 조선의 태종(太宗)은 1401년(태종 1)에 고려 태조 현릉(顯陵), 현종(顯宗) 선릉(宣陵), 문종(文宗) 경릉(景陵), 원종(元宗) 소릉(韶陵)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인 개성부(開城府)의 수령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져 대다수 왕릉은 그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으나, 여기에 충혜왕 영릉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순조(純祖)가 1818년(순조 18)에 고려 왕릉의 능주(陵主)와 소재가 확실한 30기에 표석(表石)을 세울 때나, 고종(高宗)이 1867년(고종 4)에 고려 왕릉 57기를 조사하고 표석을 세울 때에도 충혜왕의 영릉은 확인되지 않는다.
영릉은 단지 개성특급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며 능제(陵制)나 널방의 구조 및 시설 등도 파악할 수 없다. 강화도읍기(江華都邑期) 이후에 왕릉이 진전사원 근처에 조영(造營)이 되고 있었던 시대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신효사 부근에 충혜왕의 무덤인 영릉이 소재했을 가능성은 상존한다. 또한 폐위된 국왕의 장례여서 왕릉보다 격을 낮춰 개성 부근에 충혜왕의 무덤을 조성하였다면, 일제강점기에 개성 인근에 소재했다고 조사된 53개 왕족의 무덤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영릉은, 고려 국왕 중 유일하게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에서 사망하여 그 시신을 고려로 운구하고 개성에 왕릉을 조성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