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현종 1) 거란 제2차 침입 당시 거란의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으로 직접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 해 11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전투는 11월 17일부터 23일까지 1주일 간 전개되었다.
흥화진에는 순검사(巡檢使) 양규(楊規)가 거란의 압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투를 지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어쩔 수 없이 거란은 흥화진을 남겨둔 채 통주(通州) 방면으로 진격하여 삼수채에서 고려 삼군(三軍)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는 적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거란은 강조의 서신을 만들어 흥화진의 항복을 재차 요구하였으나 양규는 이를 단연히 배격하였다. 그후 1017년(현종 8) 8월 28일 거란군이 흥화진을 다시 포위공격하여 전투가 9일 간이나 지속되었다. 고려의 장군 견일(堅一), 홍광(洪光), 고의(高義) 등이 성 밖으로 출격하여 이를 물리쳤다.
1018년(현종 9) 거란 원수 소배압(蕭排押)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이 고려에 대한 제3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거란은 압록강을 건너자 흥화진을 우회하여 남하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적군의 작전을 미리 간파한 강감찬은 삼교천(三橋川) 상류의 둑을 막고 군을 매복하여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둑을 터 수공(水攻)을 펼쳤으며 매복한 군사로 적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거란 제2차 침입 때의 흥화진전투는 양규 등의 결사항전으로 흥화진이 고수됨으로써 거란군의 남하 병력을 분산시키고 그들의 후방을 교란하게 되어 고려군이 반격의 여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거란 제3차 침입 당시 흥화진전투는 강감찬의 뛰어난 전술구사와 병력운용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귀주대첩의 전승을 거둘 수 있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