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한 조선 도공에 관한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가고시마 사츠마번[薩摩藩] 나에시로가와 자료[『苗代川資料』]에 수록된 7편의 사료로, 1592년부터 1869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사츠마 나에시로가와 지역에 조선인들이 처음 도착한 시기는 게이초[慶長] 3년(1598) 11월 말에 거제도를 떠나 부산포를 거쳐 하카다[博多]에 도착한 12월 10일로 추정된다. 이때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와 함께 도착한 조선 피랍인은 80여 명 22성(姓) 정도로 추측된다. 사츠마에 도착한 조선인 피랍인들은 농사를 짓거나 조선에서 습득한 도자기 제작 기술로 생활을 이어갔다. 이 때 제작한 초기 도자기는 거칠고 질이 떨어졌으나 일본 도공보다 실력이 나아서 점차 도자기의 질이 좋아졌다. 이후 사츠마번 2대 번주 시마즈 미츠히사[島津光久, 16161695]는 조선인 혈통을 유지하는 것이 조선인의 번영은 물론 안정적인 도자 생산으로 번의 발전과 위상을 높인다고 인식하였다. 시마즈 미츠히사는 1663년과 1669년 가고시마 고라이쵸[高麗町]에 모여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나에시로가와로 강제 이주시켜 장기간에 걸친 정착 사업을 완료했다. 나와시로가와는 1684년부터 1685년까지 조선인 중심의 독립된 행정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안정적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조선인 후예들은 역인(役人)과 도예(陶藝), 그리고 농업 등에 활발히 종사하면서 번과 지역 발전에 크게 공헌했고, 조선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이후 1868년에도 유사한 이유로 이주가 단행된 바 있다.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피랍(被拉) 도공은 박평의(朴平意)와 심수관(沈壽官) 집안이다. 박평의는 초기부터 갖은 고초를 겪으며 백토를 발견하고 소위 백사츠마 도자기 제작의 길을 열었다. 심당길(沈當吉)의 후손인 심수관은 사쓰마 도자기의 명장다운 솜씨로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도자 제작과 사업, 교육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나에시로가와 조선인들은 19세기 말 이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일본식 성씨를 획득하여 일본 사회에 동화되려 했다. 박평의와 후손들은 뛰어난 기술로 도자기 생산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Meiji[明治]維新) 이후 조선인 보호가 사라지고 일본식 성씨 개명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길로 접어들어 도자기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박평의의 후손들은 군인과 외교관으로 일본의 심장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박평의와 후손들의 도자기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 그 양식의 특성과 변천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심수관가(沈壽官家)는 초대부터 지금까지 선조를 이어 그릇 제작을 꾸준히 수행하여 사쓰마 도자기의 대표로 남아 있다. 초대 심수관의 이름은 심당길로 알려져 있다. 도자 양식을 보면 초대부터 4대까지는 조선 도기 양식이 대부분이고, 5대 심수관부터는 본격적인 사쓰마 양식을 보였다. 특히 12대 심수관은 막부 말기 백사쓰마 도자기를 바탕으로 한 금채 도자기로 국제 박람회에서 수상하였고, 대형의 상형백자나 흑유 등 다양한 그릇을 남기며 사쓰마 도자기의 세계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12대의 이름을 따 심수관으로 자칭하고 있다.
현재 나에시로가와 마을에는 조선 도공의 후손인 심수관요(沈壽官窯)를 비롯해 10여 개의 가마와 전시관이 있다. 마을 안쪽에는 박평의의 후손인 도고시게노리 기념관이 있고, 반대편 기슭에는 단군을 모신 옥산신사(玉山神社)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