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시로가와 조선인 도공마을 (Naesirogawa[] 마을)

사회구조
지명
임진왜란(1592~1598) 전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모여 살며 도자기를 제작했던 규슈[九州] 남부 가고시마[鹿児島]의 마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나에시로가와 조선인 도공마을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모여 살며 도자기를 제작했던 규슈[九州] 남부 가고시마[鹿児島]의 마을이다. 처음 나에시로가와로 모인 조선인들은 이들을 데려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함께 도착한 80여 명 22성(姓) 정도였다. 조선 도공 중에는 박평의(朴平意)와 심당길(沈當吉)처럼 우수한 도자기를 제작하여 사츠마 도자기의 원조로 추앙받는 도공도 있었다.

정의
임진왜란(1592~1598) 전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모여 살며 도자기를 제작했던 규슈[九州] 남부 가고시마[鹿児島]의 마을.
나에시로가와 조선 도공마을의 형성 과정 개설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한 조선 도공에 관한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가고시마 사츠마번[薩摩藩] 나에시로가와 자료[『苗代川資料』]에 수록된 7편의 사료로, 1592년부터 1869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사츠마 나에시로가와 지역에 조선인들이 처음 도착한 시기는 게이초[慶長] 3년(1598) 11월 말에 거제도를 떠나 부산포를 거쳐 하카다[博多]에 도착한 12월 10일로 추정된다. 이때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와 함께 도착한 조선 피랍인은 80여 명 22성(姓) 정도로 추측된다. 사츠마에 도착한 조선인 피랍인들은 농사를 짓거나 조선에서 습득한 도자기 제작 기술로 생활을 이어갔다. 이 때 제작한 초기 도자기는 거칠고 질이 떨어졌으나 일본 도공보다 실력이 나아서 점차 도자기의 질이 좋아졌다. 이후 사츠마번 2대 번주 시마즈 미츠히사[島津光久, 16161695]는 조선인 혈통을 유지하는 것이 조선인의 번영은 물론 안정적인 도자 생산으로 번의 발전과 위상을 높인다고 인식하였다. 시마즈 미츠히사는 1663년과 1669년 가고시마 고라이쵸[高麗町]에 모여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나에시로가와로 강제 이주시켜 장기간에 걸친 정착 사업을 완료했다. 나와시로가와는 1684년부터 1685년까지 조선인 중심의 독립된 행정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안정적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조선인 후예들은 역인(役人)과 도예(陶藝), 그리고 농업 등에 활발히 종사하면서 번과 지역 발전에 크게 공헌했고, 조선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이후 1868년에도 유사한 이유로 이주가 단행된 바 있다.

나에시로가와 조선 도공과 그 후손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피랍(被拉) 도공은 박평의(朴平意)심수관(沈壽官) 집안이다. 박평의는 초기부터 갖은 고초를 겪으며 백토를 발견하고 소위 백사츠마 도자기 제작의 길을 열었다. 심당길(沈當吉)의 후손인 심수관은 사쓰마 도자기의 명장다운 솜씨로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도자 제작과 사업, 교육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나에시로가와 조선인들은 19세기 말 이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일본식 성씨를 획득하여 일본 사회에 동화되려 했다. 박평의와 후손들은 뛰어난 기술로 도자기 생산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Meiji[明治]維新) 이후 조선인 보호가 사라지고 일본식 성씨 개명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길로 접어들어 도자기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박평의의 후손들은 군인과 외교관으로 일본의 심장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박평의와 후손들의 도자기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 그 양식의 특성과 변천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심수관가(沈壽官家)는 초대부터 지금까지 선조를 이어 그릇 제작을 꾸준히 수행하여 사쓰마 도자기의 대표로 남아 있다. 초대 심수관의 이름은 심당길로 알려져 있다. 도자 양식을 보면 초대부터 4대까지는 조선 도기 양식이 대부분이고, 5대 심수관부터는 본격적인 사쓰마 양식을 보였다. 특히 12대 심수관은 막부 말기 백사쓰마 도자기를 바탕으로 한 금채 도자기로 국제 박람회에서 수상하였고, 대형의 상형백자나 흑유 등 다양한 그릇을 남기며 사쓰마 도자기의 세계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12대의 이름을 따 심수관으로 자칭하고 있다.

현황

현재 나에시로가와 마을에는 조선 도공의 후손인 심수관요(沈壽官窯)를 비롯해 10여 개의 가마와 전시관이 있다. 마을 안쪽에는 박평의의 후손인 도고시게노리 기념관이 있고, 반대편 기슭에는 단군을 모신 옥산신사(玉山神社)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東京大學史料編纂所 『大日本史料』
『苗代川資料』「朝鮮根本記抜粋」
高木善助(1828), 『薩陽往返記事』, 鹿児島学術文化出版(2016년 간행)
『陶器畵硏究所開業史料』1888년1월10일, 鹿兒島縣 沈壽官家소장
『第三會內國勤業博覽會沈壽誠出品解說書』(1890), 鹿兒島縣 沈壽官家所藏
『第四會內國勤業博覽會作品解說書』(1895), 鹿兒島縣 沈壽官家所藏

단행본

방병선 외, 『남원 도예문화와 일본』(南原市傳統文化育成保存會, 2010)
방병선, 『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예경, 2007)
片山まび, 『한·일도자문화의교류양상』(경인문화사, 2005)
『薩摩陶磁器傳統誌』(島津家臨時編輯所, 1926)
南邦男, 『近代日本の陶磁』(東京 平凡社, 1979)
東京國立文化財硏究所編,『明治期萬國博覽會美術品出品目錄』(東京 中央公論美術出版社, 1997)

논문

가타야마 마비, 「조선시대 김해도자기로 본 한일관계」(『한국예다학』 6, 원광대학교한국예다학연구소, 2017)
방병선, 「임진왜란 피랍도공 沈壽官家와 도자연구」(『한국학연구』 63, 고려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17)
방병선, 「임란전후피랍도공연구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지역을 중심으로」(『한국학연구』 67, 고려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18)
永竹威, 「肥前磁業史總論」(『世界陶磁全集』, 江戶三 東京 小學館, 1981)
深港恭子, 「薩摩燒をめぐる苗代川關係文書について」(『黎明館調査硏究報告』 3, 鹿兒島 鹿兒島縣歷史資料センター黎明館, 2000)
片山まび, 「壬辰倭亂前後의 朝日도자 비교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吉滿庄司, 「薩摩藩とパリ萬國博覽會」(『薩摩燒』, 鹿兒島 薩摩燒パリ傳統美展實行委員會, 2008)
山下廣幸, 「薩摩燒の歷史と發展」(『薩摩燒』, 鹿兒島 薩摩燒パリ傳統美展實行委員會, 2008)
井上和技, 「苗代川「朝鮮人」の姓氏に關する歷史的考察」(『鹿児島国際大學国際文化學部論集』 第8卷 第3号, 2008)

기타 자료

서울대학교박물관(2015), 『조선도공 400년의 명맥 심수관전』
沈壽官窯(2005),『薩摩燒沈家歷代作品圖錄』, 鹿兒島
薩摩燒パリ傳統美展實行委員會(2005),『薩摩燒』, 鹿兒島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