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용은 일제강점기 미국 전략첩보국(OSS) 침투작전에 미 육군 하사로 선발된 독립운동가, 관료이다. 1897년 서울 출생으로 북경,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후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으며,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1942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 육군 하사가 된 후 미국 전략첩보국 요원으로 활동했다. 1951년 제6대 내무부 장관에 지명되었으나 국적문제가 논란이 되었고, 미국시민권을 포기했으나 내무부 장관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이후 체신부 장관, 대한해운공사 사장, 외자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12월 8일 서울 종로구 제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5남이다. 1913년 휘문의숙(徽文義塾), 1918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동일은행에 근무하며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활동했다. 1919년 11월 중앙공우회(中央工友會) 발기인으로 간사를 맡았으며, 1921년 4월 중앙 미 감리교회에서 개최한 기독청년회 연합총회에 동대문 지역대표로 참석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건너갔으며, 1922년 4월 13일 이상재(李商在)가 이승만에게 “이순용이 신식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니 당분간 이승만 집에 머무르며 도와주기를” 청하는 내용의 추천서를 써 주었다. 상해를 경유해 1922년 미국에 도착했으며,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시민권을 취득했다.
1941년 7월 미국정부에서 정보조정국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를 창설하고, 1942년 COI가 중국을 통한 일본침투 목적의 특수첩보작전 계획을 수립해 대원을 모집하자 이승만의 추천으로, 43세에 Allen C. Wylie라는 이름으로 선발되어 미 육군 하사가 되었다.
장기영(張基永), 피터 현, 이문상(李文相), 조종익, 현승엽, 황득일(黃得逸), 장석윤(張錫潤), 정운수(鄭雲樹)등 11명과 함께 Shangri-La(현Camp David)에서 비밀군사훈련을 받던 중 1942년 6월 작전이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COI는 1942년 7월 11일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로 개편되었고, 이순용은 인도에 파견되었다.
인도 OSS요원으로 활동하던 1944년 5월 중국 곤명(昆明)의 미국 전략첩보대 본부로 전출되어 한국광복군 OSS특공작전에 참가했으나, 중국OSS 워싱턴 본부와 OSS 중국지부 사이에 관할권을 둘러싼 의견대립 등으로 작전이 실행되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하게 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미 육군 중사, 미 국무성의 특수요원 신분으로 미군 CIC(미군방첩대)에 근무하면서 백의사와 미군 CIC와의 연결을 주선했으며, 국군창설에 관여했다. 이후 미 군정청의 철수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1949년 12월 말 레밍톤 타이프라이터 회사 대표로 다시 귀국했다. 체신부 국제통신전화국 촉탁으로 재임하던 1951년 5월 7일 장택상 서리 후임으로 제6대 내무부 장관에 기용되었다. 그가 내무부 장관에 지명되자 국회에서 국적문제가 논란이 되었고, 곧바로 5월 16일 미국시민권을 포기했으나 11월 6일 국회에서 재석 134석 중 95석의 찬성으로 내무부 장관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결국 1952년 1월 12일 내무부 장관에서 물러나 같은 달 15일 체신부 장관으로 전임되었다. 체신부 장관으로 그해 3월 27일까지 재임했다.
1952년 5월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3년 5월 28일 대통령 직속 외자구매처 처장과 임시외자관리청 청장을 겸임했으며, 1955년 2월 17일 두 기관이 외자청으로 합병, 초대 외자청장으로 1960년 5월까지 재임했다. 외자구매처장 시절 서울 컨트리클럽을 창설하고 골프장을 건설하기도 했다.
1957년 대한올림픽위원회 개인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9월 국민종합경기장 건설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골프계에서는 1984년 10월 ‘이순용배 골프대회’를 신설해 이후 해마다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4·19 직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88년 10월 9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1993년에는 동아대 김광우 교수의 작품으로 이순용 흉상이 제막되기도 했다.